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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본사는 투칸 Dec 21. 2021

철도 왕국 일본과 임산부석

전철 속 일본은 친절한 얼굴일까 개인주의적인 얼굴일까

일본은 가히 철도의 왕국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철도 환경이 잘 갖춰진 나라이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수도권은 전철만 타면 못 갈 곳이 없을 정도라, 자가용이 없어도 큰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수요도 많기 때문에 주요 노선들은 하루 종일 만원 혹은 만원에 준하는 상태라고 보면 되는데, 그만큼 전철로 출퇴근하는 임산부의 출퇴근 난이도는 급상승한다.


일본 수도권의 러시아워 만원전철은 보통 일이 아니다. (출처 : flickr)


다행히 나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직후부터 거의 재택근무로 업무를 봐서, 오피스 출근은 한 달에 한 번도 할까 말까였지만(IT기업 만세!) 통원할 때나 외출할 때는 전철을 타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가급적 붐비는 시간대는 피하려고는 했지만, 그래도 만원 전철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일본에는 임산부석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내가 자주 타는 노선에는 없다. 대신 우선석(優先席)이라는, 한국으로 치면 교통약자석에 해당하는 자리가 있다. 배려가 필요한 교통약자들이 우선적으로 앉을 수 있게 마련해둔 곳인데, 한국 같으면 교통약자가 아니면 잘 앉지 않게 되는 이 자리를 일본 사람들은 그냥 턱턱 앉는다는 게 다른 점이랄지. 그렇다고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 등장하면 양보를 하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 마크가 붙어있는 곳이 우선석이다. (출처 : flickr)

전철이나 버스에 노인분들이 타면 젊은이가 일어나 양보하는 건 한국의 미덕이지, 일본에선 오히려 보기 힘든 광경이다. 하물며 임산부에 대한 좌석 양보는 한국에서도 왈가왈부가 많은 영역인데, 일본에선 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이는 개인주의적인 일본인들의 성향이 드러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교통약자 측에서도 딱히 배려를 기대하지 않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노인분들은 자리양보를 하면 극히 사양하거나 오히려 불쾌해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이가 들었어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같다. 임산부 중에도 자리 양보받는 게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문가나 차량 구석에 기대어있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 또한 일본에서 노인분들께 자리를 양보했다 거절당한 경험이 몇 번 있고, 주변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만삭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를 했지만 사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양보하는 쪽이 눈치를 보게 된다는 논리인데, 거절을 당하건 말건 노약자나 임산부를 보면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여 양보를 해왔던 골수 한국인으로선 다소 억울한 면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


그러나, 대세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배려를 해주는 사람도 존재한다. 풀타임 만원인 야마노테선에서 임산부 배지를 달고 서 있을 때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준, 나와 동년배쯤 되어 보였던 직장인 남자분. 내리면서 우선석 근처에서 서있던 임산부의 팔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당겨 앉히고 간 할머니. 주말 낮의 토요코선에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고 꾹꾹 눌린 만원 전철을 견디시던 체구 작은 아주머니. 사람 사는 동네이니 친절함과 배려, 감사한 사람은 항상 어딘가에 있다. 이런 사람들을 마주하며 내 아이는 배려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잘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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