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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본사는 투칸 Jan 27. 2022

출산 계획표라는 숙제를 눈앞에 두고

이상적인 출산이란 무엇인가


어느덧 37주, 정산기에 돌입했다. 이제는 정말 언제 아이가 나와도 괜찮은 주수에 돌입했고, 예비 엄마 아빠는 언제든 아이를 맞이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일본 산부인과에서는 보통 출산 전 바스 플랜(バースプラン, 출산 계획서)을 작성 해오라는 숙제를 내준다. 나도 얼마 전 37주 검진에서 바스 플랜을 받아서 스웨덴 남자와 머리를 싸매며 우리가 생각하는 출산 계획을 써 내려갔다.


숙제가 너무 어려운거 아닙니까

질문의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우리 병원에서 분만하기로 선택한 이유

임신과 출산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이미지

어떻게 출산하고 싶은지, 분만실에서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임신 중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출산을 실현하기 위해 행한 노력

분만 시의 희망사항

출산 후 수유 방법에 대한 희망

출산 후에 해줬으면(도와줬으면) 하는 것

즉, 출산 계획서에 쓴, 산모와 가족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출산에 최대한 맞춰주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걸 받아온 순간에도 나는 이상적인 출산에 대해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른 산모들의 작성 사례를 구글링 해봤는데, 분만 시에 듣고 싶은 음악이나, 분만실에서 아로마를 틀어주는 병원이면 원하는 향기 같은 것을 적는 경우도 있고, 회음부 절개 희망 유무에 대해서 쓰기도 한다고.


그러나 나는 저런 부분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솔직히 그저 나랑 아기가 무탈하기만 하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원하는 바가 대부분 나와 아이의 안위에 대한 내용이 되어버려서,

순산은 산모와 아이가 모두 건강한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분만을 희망하지만 제왕절개가 필요하다 판단되면 즉시 해주세요.

출산 후, 대량 출혈 등의 이유로 자궁을 적출해야 하는 상황에선 바로 수술해주세요.

와 같은 무시무시한 문장으로 가득한 출산 계획서가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게 나는 애초에 출산 도중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소의 불편함과 비싼 분만 비용을 감수하고 대학병원을 고른 것이었다. 아무리 요즘 세상이 좋아지고 의학이 발달해서 임신, 출산 중 모성사망률이 10만 명당 4~5명 정도(일본 기준)이라곤 해도, 저 4~5명에 내가 걸리면 그건 100%인 거다. 의학의 발달과 상관없이 출산은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나에게 제1순위는 무엇보다도 나와 아이의 안전이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대학병원은 로컬병원과 비교했을 때 1:1 케어나 부가 서비스(임산부 요가 교실이나 아로마 테라피 같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다. 초음파의 화질도 로컬 병원과 비교하면 3G와 5G 정도의 차이이고, 입체 초음파도 없다. 정기 검진에서도 임신 과정이 순조로우면 의사로부터 딱히 이렇다 저렇다 첨언이나 지도도 없는 편이다. 만약 세심한 진료나 1:1 케어, 임신 중에 누릴 수 있는 부가 서비스를 기대했다면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로컬 병원을 택했을 것이다.




그래도 막상 저렇게 써놓고 보니 너무 메마른 산모가 된 기분이라, 스웨덴 남자와 상의하여 조금 말랑말랑한 내용도 추가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분만 중에 남편이 분만실에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스웨덴 남자의 의사를 많이 물었는데, 그의 희망을 반영하여 추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능하면 출산 순간을 영상으로 남겨줬으면 함.

가족 면회시간(출산 직후 1시간 동안만 면회가 가능하다고 한다)에 가족사진을 찍어주면 좋겠음.




처음 출산 계획서를 받아 왔을  그저 막막하고 귀찮은 숙제를 받은 느낌이었는데, 항목을 채워나가다 보니 산모인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빠인 스웨덴 남자가 출산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계기가   같다. 특히 나는 게으른 워킹맘이라 육아휴직에 들어가기 전까진 임신과 출산에 대해 딱히 진중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휴직 후에도 아기용품 마련이니 출산 가방이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에라 모르겠다! 일단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 여기고 방치해버린 상태였는데, 출산 계획서라는 숙제가 있어 출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비록 안전제일, 리스크 회피를 최우선으로  차가운 INTJ 엄마이기는 하나, 출산은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는 따뜻하고 성스러운 순간임을 부정할  없다. 그런 점에서 부부에서 가족이 되는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를 고민하는 것은 솔직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자, 이제 나와 스웨덴 남자는 준비가 되었으니 남은  아이가 좋은 날을 골라서 나와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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