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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본사는 투칸 Jan 14. 2022

임신 후기에 돌아보는 임신기간 280일의 의미

엄마, 아빠가 되기 위한 기초공사 기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다음 주면 10개월 차 만삭 임산부가 된다. 임신기간 중 일하는 내내 몸도 마음도 고되어서 도대체 언제 출산휴가가 시작되나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정신 차리니 시작이다.


출산휴가에 들어가면 마냥 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투두 리스트가 산더미였다. 입원을 포함해 출산 후 각종 수속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아기 옷과 손수건, 침구들을 빨래하는 일까지. 산전휴가를 6주나 주는 것은 그만큼 쉴 틈 없이 할 일이 많다는 뜻이었음을 휴가를 시작하고야 깨달았다.


장장 3일에 걸쳐 아기 옷, 손수건 빨래를 마쳤다


무거운 몸으로 허덕이며 그간 사모아둔, 혹은 선물 받은 아기 옷들과 손수건을 빨래해서 널다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배냇저고리는 딱 스웨덴 남자의 손바닥만 하다. 갓 태어난 아기란 이렇게나 작고 또 작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감정은 예비 엄마만 느끼는 걸까?


스웨덴 남자가 얼마 전 저녁을 먹으며 별안간

퇴근해서 집으로 걸어오는데 곧 우리 아이가 태어나서 이 길을 같이 걷게 된다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라고 울먹이며 말했던 걸로 봐선, 이런 몽글몽글한 감정을 나만 느끼는 건 아닌가 싶다.




임신기간은 약 280일. 일본에서는 10달 10일(十月十日、토츠키 토오카)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도 많이 쓰는 임신 주수 어플 280 days는 일본에선 저 10달 10일에서 이름을 딴 '토츠키 토오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 중이다.


예비 엄마라면 다들 알고 있을 아기 캐릭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이 280일은 아이가 세상 밖에 나와서도 살아갈 수 있는 신체를 만드는 기간이기도 하나, 예비 부모들이 부모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기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임신 후기가 되어 새삼 느낀다.


일하는 예비 엄마는 바쁘다는 핑계로 태교란 걸 딱히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임신기간 동안 먹는 것, 마시는 것, 심지어는 몸에 바르는 것조차 조심했다. 임신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행하던 생활습관에 제한을 걸고 조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엄마가 될 준비를 한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사실 나는 건강 지향적인 스웨덴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정도로 편식쟁이에(지난 글 '편식쟁이 엄마라 미안해' 참조), 정크 푸드를 좋아하고, 달다구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쁜 식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임신 기간 중에는 가급적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내 인생에 이렇게 정크 푸드를 덜 먹은 기간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예비 아빠인 스웨덴 남자 쪽이 나보다도 적극적으로 아빠 될 준비를 해왔는데, 그는 스웨덴에서 공수한 육아 서적을 읽고, 그의 최애 동화책인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를 배에 대고 읽어주곤 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이케아에 가서 아기 가구를 사다가 조립하고, 아기 용품을 채워 넣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부모 됨을 실감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나와 스웨덴 남자 둘이서만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함께 만들어줬다. 임신 소식을 듣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전해오는 축하 메시지와 선물들을 보며 우리가 곧 오피셜리 애엄마 애아빠가 되는구나, 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스웨덴 할머니는 손수 실과 단추를 골라 뜨개질한 원피스를 보내왔다. 한국 할머니는 '내가 쓸 보온병 하나 사는 데는 몇 번이고 고민했는데, 손주 쓸 거는 고민도 없이 바로 결제버튼을 눌러버리네'라며 아기용품들을 사모아서 보냈다. 한국의 수많은 ‘이모’들은 예쁜 옷들과 장난감을 사다가 바다 건너로 보내줬다.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을 많이 받았다. 그만큼 베풀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앞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대목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와 스웨덴 남자, 그리고 멀리 한국과 스웨덴에 있는 가족들은 아직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홀딱 반했다. 그동안의 생활양식과 마음가짐을 송두리째 바꿔도 상관없다 생각할 정도로 지독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다들 불출이 되는 것이구나! 아기는 정말이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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