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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본사는 투칸 Apr 16. 2022

지진과 아이의 방재 가방

지진이 이제는 정말로 무섭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3월 16일 밤, 후쿠시마현에서 리히터 규모 7.4 지진이 발생했고, 내가 사는 요코하마도 진도 4 정도로 제법 강하게 흔들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꽤 큰 강도의 지진이었던지라 놀랐는데, 무엇보다도 아이가 태어나고는 처음 겪는 큰 규모의 지진이라 더욱 놀랐다.


오랜만에 보는 빨간딱지

사실 일본 살이가 길어지다 보니 지진에도 어느 정도 적응한지라, 진도 3 정도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정도다. 실제로 나와 스웨덴 남자도 진도 3 정도면 이불속에서 방재 어플 알람을 확인한 다음 흔들림이 멈추면 다시 잠들곤 했다.


그러나 이번 지진부턴 달랐다. 방재 어플은 진도 3 이상부터 알람이 울리는데, 스웨덴 남자는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서 아기침대를 붙들었고, 흔들림이 더욱 세지자 잠든 아이를 꺼내 안고 거실로 대피했다. 나 역시도 벌떡 일어나 거실로 따라나가 티비가 쓰러지지 않게 붙잡은 다음 흔들림이 멈추자마자 티비를 켜고 긴급 지진 속보를 확인했다.


아이를 다시 아기침대에 뉘이고, 우리는 배낭을 꺼내 급히 아이용 방재 가방을 쌌다. 기저귀, 바스 타월, 소독한 젖병, 가제 손수건, 휴대용 분유, 물티슈, 손 소독젤 등… 생각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배낭에 집어넣어 머리맡에 두고 나와 스웨덴 남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갓 태어난 젖먹이가 있는 상황에서 겪은 지진의 공포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무서워서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날, 다급히 액상 분유를 주문했다. 큰 지진이 날 경우 피난소로 도망 칠 경우도 있겠으나 내진설계가 잘 되어있는 일본 건물의 특성상 건물 자체에 치명적인 피해가 있지 않는 한은 집에서 대기하게 된다. 다만, 지진 발생 시 수도, 가스, 전기 등 라이프라인이 한동안 끊기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복구될 때까지 분유를 타고 싶어도 탈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다행히 모유수유 중이지만, 단유를 한 상태에서 지진이 나면, 혹은 스트레스로 인해 모유가 갑자기 안 나오게 되면 등(실제로 재난 상황에 모유가 안 나오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여러 상황을 가정하니 집에 액상 분유를 비축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여태까지 사야지 사야지 하면서 구매를 미뤘던 휴대용 가스버너와 부탄가스를 사고, 생수의 비축량도 늘렸다. 일본 생활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드디어 방재 대책에 진심을 다하게 된 것이다.


방재용으로 급히 주문한 액상 분유


어른이야 며칠 굶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아이는 아니다. 어른이야 며칠 못 씻고 화장실이 불편해도 괜찮지만 아이는 아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얼마나 나이브하게 살아왔는가, 나와 스웨덴 남자는 이번 지진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이가 생김으로서 세계관이 180도 바뀐다는 것이 이런 경우인가 싶다.




 지진의 여파로 최근 일본은 지진이 잦다. 스웨덴 남자가 출근하고 집에서 혼자 잠든 아이를 안고 소파에 앉아있을 때, 지진이 나서 아이의 모빌이 흔들흔들하는  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은 진지하게 지진이  발생하는 관서지방, 혹은 한국으로 아예 이주를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일 지경이다. 여태까진 지진이 나도 어떻게든 되겠지, 였다면 이제는 정말 어떻게든 해야 하는 입장이므로. 정말 진심을 다해 지진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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