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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페 Jan 16. 2020

대공황과 금융규제의 시작

행동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1부

대공황과 금융규제의 시작

앤드류 셩(중국은행규제위원회 수석고문) "금융전문가들은 왜 진짜 엔지니어들의 4배에서 많게는... 백 배 이상의 돈을 받죠? 엔지니어들은 다리를 만들고, 금융전문가는 꿈을 만들잖아요. 이런 꿈이 악몽이 될 때, 그 대가는 또 다른 사람이 지불하겠죠"


[원문] Andrew Sheng "Why should a financial engineer be paid four, four times... to a hundred times more than the, uh... real engineer? A real engineer build bridges, a financial engineer build, build dreams. And when those dream turn out to be nightmares, other people pay for it"


2008년 9월, 미국을 진원지로두고 발생한 범세계적 금융위기(재난이라는 표현이 옳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만사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인사이드 잡]의 후미에 나오는 앤드류 셩의 인터뷰 내용이다. 1시간 40분가량의 러닝타임을 자잘한 설명과 인터뷰 영상만으로 이끌어나가지만, 제작진이 이 짧은 러닝타임 안에 담아낸 내용들은 그 어느 영화보다도 충격적이고 잔혹했다.


금융위기가 일어났던 2008년의 나는 사회를 이해하기엔 어린 14살의 아이였지만, 당시 TV만 틀면 연일 보도되었던 미국의 금융위기에 대한 뉴스들과 뉴스를 심각한 표정으로 보시던 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이따금씩 뉴스와 기사를 통해 2008년 금융위기(이하 '대침체')의 단면적인 내용(금융시스템의 구조적 문제, 신용평가기관의 도덕적 해이, 정부 정책의 영향 등)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영화 [인사이드 잡]은 당시 금융위기를 유발한 책임이 있는 금융권 인사들과 저명한 경제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대침체는 '의도하지 않은 사고'가 아닌 직업윤리의 부재로 인해 생긴 '인재'라는 사실을 고발하며 월스트리트의 정경유착을 파헤치고 책임자들의 민낯을 낱낱이 들춰낸다.


 영화는 대침체의 원인에 대한 보다 쉬운 이해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는 친절한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시간이 제한적이며 소비의 대상이 일반 대중에 맞춰져 있다 보니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힌 이야기들에 대해선 최소한의 설명, 혹은 생략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편에 걸쳐 2008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하여 어쩌면 조금은  본질적인 이야기와 [인사이드 ] 자세하게 다뤄주지 못한 사건들, 혹은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경제, 금융용어들을 시간 순서대로 가능한 쉽게 풀어가며 글을  내려갈 생각이다.


나에게 이런 글을 쓸 만큼의 충분한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대하여 더 엄격한 잣대를 세웠으며, 정보의 출처와 사전적 정의를 보다 명확히 하려고 노력했다. 이 글에서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러분에게 금융위기에 대하여 보다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는 글이 될 것임을 독자들에게 약속한다.




2019.02.02


  [인사이드 잡]은 대침체의 원인으로 1982년 레이건 정부의 간-세인트 저메인 예금기관 법(Garn-st. Germain Depository Institution) 도입을 꼽는다. 대공황 이후의 미국은 1982년 간-세인트 저메인 예금기관 법(이하 '간-세인트 저메인 법'으로 칭함)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금융회사에 대하여 엄격한 금융규제정책을 시행해 왔는데, 이는 금융기관이 타인의 돈으로 기업, 더 나아가 미국의 경제와 정치 등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미국 대중의 정서적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공황

  '광란의 20년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의 미국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산업기반이 무너진 유럽과는 대조적이었다. 산업의 발달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고, 그 번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화와 예술이 활짝 피어났다. 도로엔 자동차 경적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온 거리가 라디오, 영화, 재즈에 대한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찬란했던 번영기의 이면에서 극단적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나타났으며 사회 전반엔 도덕성과 윤리의식의 결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1913년엔 헨리 포드가 공장에 포드 시스템(1)을 도입하면서 생산성이 극대화되었으며, 전기의 상용화로 인해 선풍기, 다리미, 전등, 라디오와 같은 현대 가전제품들이 개발되었고, 자동차 산업과 전기 산업을 필두로 한 제조업의 성장은 철강, 화학, 석유산업의 동반성장을 이끌어냈다. 또한 라디오와 영화, 재즈와 같은 오락문화의 발생은 소비심리를 자극해 국민들의 지갑은 항상 열려있었고, 기존엔 없던 새로운 시장의 출현으로 탄력 받은 주식시장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전례 없는 경제성장 속도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강대국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미국의 호황기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번영이 영원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전례 없는 호황기의 이면엔 모두가 외면하고 있던 불편한 진실들이 숨어있었다.


  1920년대의 미국 사회엔 최저임금이라는 제도가 없었다. 산업의 발전과 국제정세가 시기적절하게 작용하면서 고용주들은 돈을 쓸어 담듯 벌 수 있었지만 이들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들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싶어 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임금이었다. 미국은 노동자들의 최소 임금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지 않았고,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아래의 그래프를 보자.

출처 : https://eml.berkeley.edu/~saez/SaezZucman14slides.pdf

이 그래프는 소득 상위 0.1%가 가지고 있는 자산의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1928년을 보자, 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 0.1 퍼의 자산가들이 23%에 해당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시기는 2008년 금융위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 역사상 빈부격차가 가장 심각했던 시기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될수록 상대적 저소득층의 소비심리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런 소득 불균형 현상이 장기화될수록 [저소득층의 수요 감소에 따른 내수시장의 불황 - 전체 생산물량 대비 판매량 감소 - 기업의 재고율 증가 - 생산 감소 - 설비투자 감소 - 고용감소 - 경기 둔화/침체]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당시 미국은 빈부격차와 생산량 증가가 동반 상승하는 기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

 

   원인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세계 1차 대전은 파악된 인명피해만 대략 4천만, 각 국의 도시기능은 마비되고 산업은 붕괴되었으며 막대한 전쟁 채무를 빚진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상대적으로 미미한 인명피해가 전부였고,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팔아넘기며 전례 없는 호황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연합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 빚진 수십억 달러의 전쟁 채무를 갚기 위해 패전국인 바이마르 공화국(현재의 독일)에게 전쟁배상금으로 현재가치 약 200조에 해당하는 1320억 마르크를 책정했지만 현실성 없는 배상위원회의 요구에 독일은 첫해 35억 금 마르크를 상환하고 지불 불능을 선언, 결국 서유럽 국가 들은 전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다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유럽이라는 거대한 수요층 덕분에 빈부격차와 산업생산량이 동반 상승하는 미국의 기형적인 산업구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이라는 특수한 시장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경제와 산업이 회복되어 자체적으로 물자를 공급할 수 있게 되면 미국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점차 낮아질게 뻔했던 한시적인 시장일 뿐이었음에도 수년간 이어진 대 호황기로 인해 미국 사회 전역엔 비이성적인 낙관론이 즐비했다. 기업가들은 내수시장의 불황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고 매년 생산시설을 증축하였고(대공황 직전엔 세계 생산량의 42%를 미국이 담당하고 있었다), 은행들은 조건 없이 무분별한 대출을 감행하였으며(관련 자료), 가계는 이런 은행의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그 결과로 가계부채는 10년 사이에 두배로 급증하게 되었다.)

 

   은행의 돈벌이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1920년대의 미국 정부는 금융기업에 대한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않았고, 상업은행이 보험업, 증권업, 부동산 신탁업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었다. 금융기업들은 회사 주식이나 어음, 그리고 채권을 매매하고 발행을 중개하는 등 기업에 대한 투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또한 상위 소득자들의 잉여자금 또한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증권시장은 더욱 불타오르게 된다.

 

   증권시장을 두고 자본주의 꽃이자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 과장이 아니다. 경제성장이 지속될 때 증권시장에서 적정 수준의 과열은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성장을 촉진시키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문제는 1920년대의 경제성장이 과잉생산과 부채에 기반을 둔 성장이라는 것과, 투자자들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여 본질적인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1929년, 호황기에 가려졌던 문제점들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유럽의 산업이 복구되면서 미국의 대외 수출량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 차려보니 모든 품목 재고자산이 전년대비 3배나 증가한 상태였다. 기업 부실 현상이 진행된 것이다. 이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선 판매량을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지만 이미 내수시장의 구매력은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 미국의 대외 수출량이 매년 큰 폭으로 추락할게 분명해진 상황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생산량을 줄여 재고율을 낮추는 것 뿐이었다. 그러려면 공장의 가동시간을 줄이거나 멈춰야 하고, 공장이 놀고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기업의 설비투자는 줄어들 것이다. 투자가 줄어드니 고용도 줄어들고, 국내총생산(GDP)도 줄어들 것이다. 앞에서 우려했던 내수시장의 불황 - 전체 생산물량 대비 판매량 감소 - 기업의 재고율 증가 - 생산 감소 - 설비투자 감소 - 고용 감소 - 경기침체 사이클이 그대로 작용하면서 영원히 호황기일 것 같던 미국의 모든 건전한 경제지표들이 경기가 하락세로 들어서기 시작했음을 나타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공황의 시작으로 알려진 '검은 목요일'이 발생하기 약 한 달 전인 1929년 9월 3일, 다우 존스 산업 평균 지수는 381.17로 당시 신기록을 달성하였다) 대부분의 경제, 산업지표가 호황기의 종언을 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던 낙관주의로 인해 투자자들은 무모한 투자를 감행하였고, 결국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단 한 번의 출렁임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381.17에 달했던 다우지수는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는 10월 24일 장이 마감된 시점에 299.47로, 하루 만에 약 20%가 증발했다. 일부 금융업자들이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몇몇의 상장사들을 고액으로 매입하기로 하면서 잠깐 진정되나 싶었지만, 27, 28, 29일 연달아 주가가 하락하자 공포감을 이기지 못한 투자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매도하기 시작하면서 10월 29일, 230.07로 장을 마감한다. 불과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다우지수의 가치가 1/3이 토 막나 버린 것이다.

 

  대공황의 여파는 1929년 시작되어 1933년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수천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수만의 사업장이 망했다. 공중분해된 예금액만 32억 달러에 달하고 국민소득은 반토막이 났다. 1300만 명이 직장을 잃었고 수천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정도는 미국이 제일 심했을지라도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전히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고, 유럽의 자산가들마저 미국의 증권시장에 관여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경제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돈이 투입되었다. 미국의 다우지수는 대공황 직전 수준까지 돌아오는데 20년이란 시간이 걸릴 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금융규제의 시작

  대공황은 내외적으로 수많은 변화를 야기시켰다. 대공황으로 발생한 디플레이션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수습 중이던 독일의 경제를 다시 괴멸 상태로 만들었고, 이를 나치 정권이 빠르게 안정화시키면서 극단적 파시즘 국가의 탄생을 견인하였으며,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가 침체기로 빠졌을 때 홀로 10%대의 성장을 일궈낸 소련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면서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되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 긴장상태를 유발했다.

 

  내적으로는 1931년 데이비스-베이컨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에서 최저임금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대공황의 원인을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보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한 정부의 방임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경제학계의 변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부가 인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야 한다'는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조세, 복지, 금융규제정책들을 시행하여 미국의 중산층이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대공황을 유발한 책임자로 무분별한 투자를 감행한 거대 금융기업들이 지목받으며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기업에 대한 적대감, 특히 금융기업에 대한 적대감이 절정으로 치닫아 금융규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공황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막대한 자본금을 바탕으로 수십 개의 회사를 인수하여 미국의 금융, 산업 시장을 지배했던 금융기업 JP모건의 공격적인 경영이 이를 부추긴 감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반기업적인 정서에 기반한 유권자들의 정치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1933년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의 통과를 시작으로 은행과 증권회사의 연관관계를 제도적으로 단절시키고 상업은행의 투자업무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은행은 아직 불완전했던 은행법의 허점을 노리고 합병과 구조조정을 통해 규제를 피해보려 했지만 정부는 발 빠르게 1956년 은행지주회사법, 1960년 은행 합병법을 통과시키며 기업 지배를 목적으로 한 은행의 비은행 지분 보유, 비은행의 은행 지분 보유를 금지시키고 인수 기준을 강화하는 등 금융규제에 대한 굳건한 입장을 고수했다.


  인위적으로 금융과 산업을 단절시키고 은행의 권한을 제한하는 강력한 금융규제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중산층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고,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약 25년간 진행된 세계경제의 대호황기를 안전하게 주도할 수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금융규제로 인해 발생한 금융비용의 인상, 기업 유동성 제약(2)의 악화, 정보 비대칭(3)의 심화와 같은 문제들은 1970년대에 발생한 두 사건과 복잡하게 작용하여 미국 사회에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1) 포드 시스템 : 헨리 포드의 경영원칙인 포디즘(fordism)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도입한 생산공정 시스템. 주요 골자로는 제품의 표준화, 작업의 전문화,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이동 조립방식이 있다.

(2) 유동성 제약의 약화 : 소비자가 경제·사회적인 이유로 금융회사가 제공하는 대출 서비스 접근에 있어 제약을 받는 경우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기업의 유동성 제약 악화는 기업이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3) 정보 비대칭 :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에서 당사자들이 보유한 정보에 차이가 있는 현상.








참고자료


1. 1929년의 경제공황은 무엇인가?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3885#09T0

2. Wealth Inequality in the United States since 1913

https://eml.berkeley.edu/~saez/SaezZucman14slides.pdf

3. Great Depression History

https://www.history.com/topics/great-depression/great-depression-history

4.The U.S. Economy in the 1920s

https://eh.net/encyclopedia/the-u-s-economy-in-the-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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