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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갬성꿈나무 Aug 08. 2023

24. 나의 최대 약점은 가족입니다

나의 약점은 가족이다. 부모님은 70대가 돼서도 일을 하셨다. 자식이 여섯이었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은 여러 차례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빚은 계속 늘었다. 맏딸, 맏아들인 언니와 큰오빠는 가계를 도와야 해서 스무 살 남짓부터 사회생활을 했다. 언니와 큰오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따로 살았기 때문에 자주 볼 수 없었다.


나는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언니를 동경했다. 언니는 예뻤다. 멋스러운 옷을 입었고, 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렸다. 언니는 한 달에 한 번 본가에 와서 이틀 정도 머물다가 자취하던 곳으로 떠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언니는 나와 막냇동생을 데리고 극장에 데려가서 만화영화를 보여줬다. 책 대여점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줬다. 어떤 날은 옷을 사주었다.


엄마가 잘 몰라서 챙겨주지 못한 세세한 것들은 언니가 살펴줬다. 첫 월경을 겪고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했던 나는 언니의 따뜻한 말에 금세 마음이 놓였다. 언니는 나에게 축하한다고 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고 했다. 말주변이 없어 쭈뼛거리기만 했던 나를 알아주는 언니가 좋았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읽는 언니가 신기했다. 언니처럼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열두 살 정도 됐을 때 언니의 일기를 몰래 읽은 적이 있다. 가난이 죽도록 싫다는 내용이었다. 가난은 죄라고도 적혀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그 일기를 보고 난 후부터 언니가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언니가 웃는 걸 봐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언니의 진짜 속마음은 어떨까? 어른이 되면 진짜 감정을 숨기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롤모델이었던 언니를 어린 소녀로 보게 된 순간이었다.


우러러보던 언니의 당시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20대 중반의 꿈 많고 꽃 같은 여자. 그게 그때의 언니였다.


언니는 이제 다 늙어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하는 50대 초반의 아줌마가 되었다.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는 언니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치킨이나 시켜 드시라고 기프티콘을 보내는 나도 언니와 똑같이 아줌마가 되었다. 드디어 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짬바(?)가 됐다.


언니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내가 마흔이 넘었을 때 건방을 떨며 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언니의 20대를 돌려줄 순 없지만, 남은 인생 후회 없이 즐기면서 살게 해 주겠다고. 서울에 몇십 억 되는 집을 사줄 순 없지만,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행복을 자주 느끼게 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각서다. 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딸 같은 동생의 굳은 의지가 담긴 편지일 수도 있겠다.


나의 최대 약점은 가족이다. 가장 여리고 말랑한 부위. 그래서 반드시 단단해져야 한다. 지키고 보살펴야만 한다. 20대에 가난을 미워하면서도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던 언니가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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