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크레이그 마틴展'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Martin, b. 1941)의 예술 인생을 총망라한 대규모 회고전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개념미술의 1세대 작가로 1970년대 부터 80년대까지 런던 골드스미스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데미안 허스트, 줄리안 오피, 사라 루카스, 게리 흄,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의 젊은 예술가'(yBa)들을 양성한 스승이자 현대 미술의 대부로 칭송받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국제갤러리에서 진행한 줄리안 오피의 개인전을 인상깊게 보았기에, 스승인 그의 전시 소식에 기대는 배가 되었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의 1970년대 초기작부터 2021년 최신작까지, 총 150여 점의 작품들로 채워지며 개념미술의 상징적인 작품인 ‘참나무(An Oak Tree, 1973)’가 아시아 최초로 공개된다고 한다.
전시는 Exploration(탐구: 예술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 Language(언어: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 도구, 글자), Ordinariness(보통 : 일상을 보는 낯선 시선), Play(놀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예술적 유희), Fragment(경계: 축약으로 건네는 상상력의 확장), Combination(결합: 익숙하지 않은 관계가 주는 연관성)까지 총 6개의 테마로 구성된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작업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는 대학시절 1960년대 성행했던 미술사의 일환인 다다이즘, 미니멀리즘, 팝 아트와 같은 현대미술사를 두루 섭렵한다. 그는 <샘(Fountain, 1917)>이라는 제목으로 공산품인 변기를 전람회에 출품한 마르셀 뒤샹과 같은 혁명적인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사물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고 그 해답은 그의 작품 세계의 근간인 개념미술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참나무(An Oak Tree, 1973)> 을 포함하여 그의 초기작들은 회화적 형식이나 기교는 뒤로하고 검은색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점이 눈에 띈다. 물체의 본질에 집중하고 감상자로 하여금 본인의 기억에 기대어 자유롭게 상상하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전시장의 벽면에는 크레이그 마틴의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그는 물잔의 물리적 본질을 참나무로 바꾼다. 그는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 물잔을 참나무로 정의한 것과는 다르다고 설명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물체의 본질 자체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물잔을 참나무로 명명하는 순간 물잔은 그저 형태로만 존재한다.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참나무라는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물체의 이름은 교육과 사회화에 의해 약속된 언어일 뿐이다. 보는 이의 기억과 경험, 창의력을 통해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문득 스위스의 작가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가 떠올라 소설 속 한 구절을 떠올리며 전시를 감상했다.
"언제나 똑같은 책상, 언제나 똑같은 의자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진이야. 그리고 나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하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지?"
"이제 달라질 거야." 이렇게 외치면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페터 빅셀,『책상은 책상이다』 중에서
개념미술이라는 말은 처음 사용한 헨리 플린트는 음악의 재료가 소리인 것처럼 개념예술은 무엇보다도 개념을 재료로 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개념들은 언어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개념예술은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에게 알파벳은 언어가 아니라 오브제다. 건축가들이 구조물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짓듯, 그에게 알파벳은 다른 이미지들을 쌓을 수 있는 견고한 구조물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언어의 의미와 기호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언어의 자의성'이라는 개념이 떠올라 문자 언어와 예술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흥미롭게 관람했다.
서랍, 컵, 안전핀, 샌들, 메트로놈… 알파벳이 조합된 단어와 오브제들은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 속 알파벳이 조합된 단어와 오브제들은 사실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이미지 역시 단어에 내포된 사회적 정보를 배반하고 있다. 그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물을 작품에 등장시키지만 서사는 따로 부여하지 않는다. 관람객들은 그저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의존하여 자유로운 감상을 하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알파벳을 그리는 방식 또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고수한다. 평평한 색이 만들어지도록 두 줄로 글자를 쓰고 그 안에 색을 넣는 스타일은 다른 작업에서 보여지는 스타일과 흡사하다. 그는 주로 욕망 DESIRE, 죽음 DEATH, 사랑 LOVE, 이름 NAME과 같이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추상적 단어들을 사용하며 그림을 통해 관람객들이 개인의 기억이나 상상력에 의존할 수 있도록 한다. 궁극적으로 그는 알파벳 페인팅 작업을 통해 사색과 상상력 그리고 아트적 놀이를 위한 원천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제목을 짓는 것을 관람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대부분의 제목명은 Untitled(무제)로, 무엇을 그렸는지에 관한 간략한 정보와 함께 공란으로 남겨둔다. 감상자들은 작품을 각자의 기억이라는 프리즘에 투영시켜 자신만의 제목을 부여하고 재해석을 해볼 수 있다.
Untitled (cowboy hat turquoise)이란 작품을 보며 동화 『어린왕자』 속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을 떠올렸다. 혹자는 미서부 영화의 카우보이의 머리에 걸쳐진 hat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작가는 본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무엇을 그렸는지 바로 알기를 원하기 때문에 유명하고 이미 알려진 사물만 그린다고 한다. 관람자들이 무엇을 그렸는지 추측하다 보면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시각과 기억이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눈의 작용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우리의 일상적 오브제들을 간결한 라인과 평범하지 않은 컬러로 표현하여 오브제를 객관화 시킨다. 그렇게 그는 오브제의 본질을 작가의 의도대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며 단순한 이미지의를 통해 감상자들이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작가는 아쉽게도 가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도 있다고 한다. 수년 전 그린 작품 속 사물이 그 당시엔 아주 인기가 많고 유용했지만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나 또한 학창시절 2g 폴더폰을 쓰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요즘 중고등학생 친구들이 ‘고아라 폰’을 모른다고 할 때 아쉬웠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 역시 누군가 그림 속 물건을 실제로 본 기억이 없다면 작품을 이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시대상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 Zoom >이라는 작품은 코로나 19로 인한 록다운을 반영한 작품이다. 작품 이름은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화상회의 소프트웨어인 줌(zoom)이다. 작품 속 노트북들은 줌의 알파벳 첫 글자인 ‘Z’를 떠올리도록 배치되어 있다. 일종의 시각적 의성어인 셈이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벽화를 종이에 그린 후, 사진을 찍어 슬라이드 필름을 만든다. 이를 프로젝트를 통해 벽에 투사하여 그에 맞춰 블랙 테이프를 이용해 라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런 기법을 통하면 그는 원하는 벽에 원하는 크기로 마음껏 다양하게 무엇이든 그린다. 물리적이지도 않고 물질적이지도 않은 오브제들이 입체적인 존재감을 갖게 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그에게 크레페 종이로 만든 테이프는 작품의 중요 재료이다. 마이클은 이 테이프가 없었다면 본인의 모든 작품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유연해서 곡선을 그리기에도 수월한 이 테이프는 본래 전자산업을 위해 디자인되었으며 트랜지스터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테이프라고 한다.
작가는 본인의 그림을 2차원의 조각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을 조각가로 칭한다. 드로잉이 회화적 공간이 아니라 조각적 공간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슬라이드 필름을 만들고 이를 프로젝트를 통해 그대로 벽에 투사하여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작품의 간격이 2차원적 평면이 아닌 3차원적 생명을 갖고 미묘한 공감각으로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옆에서 보면 그저 그것은 2차원적인 색과 선으로 보여진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본인의 작업을 진보적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작업을 하던 한때 개념 미술은 청교도적 절제미가 매우 뚜렷했으며 사진도 대부분 모노톤이었다. 당시의 미술 사조에서 색은 많은 색을 사용하는 것은 장식적이고 가벼워 보인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따라서 진솔하고 진지한 것은 대부분 흑백으로 표현되었지만, 그는 이것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시대의 관념을 살짝 비틀어 레드 컬러를 포인트로 사용했다.
이후 그는 색채가 드로잉에 끼치는 영향을 발견하고부터 작업 방식이 변화한다. 색상은 오브제에 일종의 정체성을 제공하고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는 본인의 작품을 정의할 때 사물은 변함없이 정확하게 그리되, 컬러는 아주 인공적으로 사용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일상에서 익숙한 공산품을 그리고 명확한 원색을 곳곳에 채워 나가며 컬러를 직관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관람자가 본인의 작품을 조금 더 쉽고 편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또, 작가는 정통 미술 수업의 금기 사항을 일부러 적용해보려고 노력했다. 한 작품에 너무 많은 색을 사용하면 안 되고, 캔버스 정중앙에 무언가를 배치하거나 캔버스 가장자리로 치우치게 그리면 안된다는 말은 어릴 적 미술학원에 다녀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그림의 위치가 캔버스 사면의 가장자리 끝까지 가 있는 작품도 만들어낸다. 실제로 그의 작업 관례 중 하나는 가장자리로 향하는 이미지와 가장자리로 향하지 않는 이미지, 가장자리를 넘어 뻗어나가는 이미지의 차이를 의식하며 구도를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기존 예술이 갖고 있는 형식성에 반발하고 전복을 시도한다.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게임 중에서는 '현미경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대상을 아주 높은 배율로 확대해서 보여주고 그것이 무엇인지 맞추는 게임이다. 아무도 맞추지 못하면 조금씩 배율을 낮추는 식으로 게임은 진행된다. 처음에는 너무 가까이 확대되어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모양인지 알 수 없다.
Fragment(경계: 축약으로 건네는 상상력의 확장) 섹션에 위치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마치 현미경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물의 맥락과 그림자, 세부 정보가 제거된 후 파편처럼 남은 사물들은 프레임 밖으로 일부가 잘려 나가기도 하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떠올리게 되는 사물들도 있었다. 감상자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는 필요한 부분이라, 마치 작가와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적절히 구분된 섹션들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고, 전시의 기승전결도 잘 짜여져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전시는 4월 8일부터 8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니, 형형색색의 작품들을 보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전문필진 | 박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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