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크라멘토(Sacramento) 이야기
재미가 없었다. 도무지가 재미라고는 1g도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이었다. 스무 살에 마주한 캘리포니아는 내가 상상했던 그런 곳이 전혀 아니었다. 내 무지가 낳은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난 캘리포니아가 얼마나 큰 곳인지 무슨 도시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었으니까.
캘리포니아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설렘이 있었다.
어렸을 때 큰 인기를 끌었던 베이워치(로스 엔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90년대 해양 구조대 미드) 때문이었을까. 미디어가 내 선입견을 만드는 것에 분명 한몫 단단히 했음은 틀림없었다. 일 년 내내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비키니의 미녀들과 몸짱 서퍼들이 넘쳐 나는 해변, 높디높은 야자수가 늘어선 길과 친절하고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 뭔가 그런 장면들이 그 당시의 내가 가지고 있는 캘리포니아에 대한 환상이었다. 온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에는 실제로 그런 곳이 많이 있다. 그런데 스무 살의 내가 미국에 처음 와서 살게 된 곳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새크라멘토(Sacramento)라는 생소한 이름의 도시였다. 첫인상은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젊은 사람들보다 노인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웬열? 이곳이 캘리포니아주의 주도(Capital city)라고 했다. 그런데도 인구는 40만 명 남짓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조금은 황당 그 자체였다.
하필이면 새크라멘토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사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한 일이었고 거기에 대해서 불만 같은 건 딱히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와 과정이 있었고 그렇게 주립대로 편입하기까지 새크라멘토에서 3년을 살았다.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것이 그 당시 미국에선 많은 사람들이 녹색 화면의 매우 커다란 모토롤라 폴더폰을 사용했고 한국 방송을 보기 위해서는 한인 마켓 안쪽 구석진 비디오 샵에서 VHS 테이프를 빌려봐야만 했었다. 이제는 모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 아재 판독기 문제로나 나올 법한 추억의 물건이다. 그것조차도 한국에서 방송한 뒤 미국 현지에 비디오로 나오기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전화는 어땠을까. 한국과 통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국제전화 비용을 감당해 내거나 국제전화용 선불(Pre-paid) 카드를 $10불 내지는 $20불을 주고 미리 사서 써야만 했었다. 통화를 하다가 카드에 돈이 떨어져 끊어지기도 일쑤였다. 대중교통이야 말로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 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거북이 같이 느려 터진 버스를 중간에 두 번 갈아타고 편도로만 거의 1시간 이상(차로 운전해서는 불과 20분 거리를 노선이 없어 엄청 돌아가야 했다)을 가야 할 만큼 대중교통이 열악했다.
굴러가기만 하는 똥차라도 있었으면 했던 그 몇 달의 불편함보다도 사실 더 힘들었던 것은 어느 누구 하나 기다리지 않는 버스를 홀로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외로웠다. 가끔은 그 기다림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해 중간에 갈아타야 할 버스를 타지 않고 그다음 버스까지의 거리를 일부러 걷곤 했다. 걸으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고 답답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나는 처음 한동안 핸드폰도 차도 인터넷도 없는 고립된 세상에서 살았었는데 그래서 그 당시 내 유일한 친구는 싸구려 필립스 CD 플레이어였다. 또 다른 추억의 물건이다. 뭐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할 수 있던 것도 딱히 연락할 누군가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사실 있으나 없으나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요즘처럼 전 세계가 SNS와 인터넷으로 하나 되어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시대에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일 테지만, 한때는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은 세상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 그때부터 인터넷 강국이었던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인터넷 보급률도 낮았고 속도도 엄청나게 느렸으며, 종이신문이 온라인 신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아날로그 한 세상이 있었다. 불과 15년 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몰랐던 것이지만, 지금도 미국은 대중교통이 보편화돼있는 샌프란 시스코, 뉴욕, 시카고 등 몇몇 큰 도시를 제외하고는 이동을 위해서는 자가용이 필수이다. 소도시일수록 가족 명수에 맞춰서 각자 차가 한대씩 있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이다. 이런 도시에서 느려 터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나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 아직 차를 갖지 못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에만 20년을 살았던 나는 머리로만 막연히 알았던 사실을 그때 몸으로 체험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정말 쓸데없이 더럽게 넓다는 것을! 새크라멘토에서는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차가 없이는 슈퍼마켓에 물을 사러도 갈 수 없는 도시에서 차는 곧 이동수단이자 생존 도구이다. 그렇기에 어느 도시에 가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미국에 오는 이민자들과 유학생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은행계좌를 열고 면허시험을 보고 차를 구입하는 일이다. (Fun fact - 캘리포니아는 면허시험을 볼 때 본인이 도로주행시험에 응시할 차량을 직접 가지고 가야 한다. 따라서 차를 빌려줄 주위 사람이 필요하다. 필기시험은 한국과 비슷한데 한국어로도 볼 수 있고 따로 장내 기능시험은 없다).
미국에 처음 오는 학생들이 그렇듯이 나는 우여곡절 끝에 랭귀지 스쿨에 등록했다. 사실은 어덜트 스쿨(Adult School)이라는 곳에 처음 한 달 여정도 다녔는데 혹시라도 미국에 와서 누가 어덜트 스쿨을 다닌다고 하면 바지 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말릴 것이다. 이름은 성인 학교이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영어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어르신(?)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나는 흰수염이 덥수룩한 우크라이나 이민자 아저씨들과 불법 체류하는 멕시코 아줌마들과 클래스메이트였다. 그들은 말을 나보다 훨씬 유창하게 했지만 알파벳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생계형 막무가내 영어였다. 그렇기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준의 영어 수업에 나는 흥미를 쉽게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어덜트 스쿨은 수업료가 없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면에서 손해를 본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 나는 어렸고 외로운 정착기에 알 수 없는 자괴감마저 더해준 한 달이었다.
한국의 입시용 주입식 영어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사실 거의 벙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입이 있어도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고통은 외국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최소 7-8년을 영어교육을 받았는데 한마디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건 분명히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잘못된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나마 단어나 듣기 평가는 수능 공부로 단련이 되어 있었으니 상대방이 하는 말을 대충은 알아는 듣겠는데, 목구멍에서 대답할 말이 나오지 않는 답답한 경험은 모든 이민자/유학생들이 한 번쯤은 경험해봤으리라. 이시절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에서 어학 수업을 들을 때 미국인 선생님들이 나에 대해서 여러 번 놀라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말도 어버버 잘 못하는 동양인 남자애가 문법이나 쓰기, 독해 시험을 하면 반에서 최상위권에 곧잘 드니 어찌 보면 미국 사람의 눈으로는 당연하게도 상당히 신기한 일이었을 터이다.
새크라멘토의 첫여름은 미치도록 뜨거웠다.
덥다는 표현보다 뜨겁다는 표현이 아마 적절할 것이다. 한여름의 기온은 화씨 110도를 찍는 날도 종종 있었다 (섭씨로 43도가량). 다행히 습도가 낮아서 한국의 30도 날씨보다도 땀은 훨씬 적게 났다. 그늘을 찾아 그 밑에 있으면 시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워낙 높기에 하루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낮에 수업을 듣는 동안 주차 해 놓은 차를 다시 타는 그 순간이었다. 앞 창문에 그늘막을 쳐놓음에도 불구하고 핸들은 늘 손으로 잡기 힘들 만큼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 순간의 차 안은 웬만한 한증막 사우나 저리 가라였다. 어느 날 수업에 늦는 바람에 차 안에 깜빡하고 콜라캔을 놓고 내렸던 친구 하나는 그날 차 안에서 캔이 폭발해 있는 콜라 지옥을 경험했다. 그 친구에겐 영원히 잊지 못할 웃픈 기억 이리라. 그래도 한국의 여름을 떠올려 보자면 열대야와 모기가 없다는 사실은 꽤나 행복했다. 기억나는 겨울은 그리 길지 않고 눈도 오지는 않았지만 꽤나 쌀쌀하고 비가 많이 왔다.
따지고 보면 새크라멘토가 내가 무시할만한 수준의 도시는 아니다.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주가 캘리포니아주이고 면적이 대한민국의 4배에 육박하는 바로 그 주의 행정중심인 주도이자 미국에서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도시 중의 하나 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직원만 몇만 명 되는 새크라멘토에서 가장 큰 고용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크라멘토가 시골처럼 느껴진 이유는 아마도 넓은 면적 때문일 것이다. 40만의 인구가 한없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새크라멘토의 면적은 거의 서울의 절반 크기에 맞먹는다. 그 넓은 땅에 40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으니 얼마나 한적하겠는가!
새크라멘토 안에서는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 말고는 사실 놀만한 것들이 많지는 않았다.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인 술 마시기와 각종 운동, 쇼핑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즐길 거리가 없었기에 정신없는 서울에서만 20년 살아온 나에게는 종종 답답하고 심심한 곳이었다. 공부와 도서관 생활이 주였긴 했지만 가끔 스트레스는 풀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나마 술을 마실 때에도 주로 친구네 집에 모여서 마셔야 했고, 운전을 해야 했으므로 그마저도 술을 안 마신 친구가 집에 데려다주거나 그 집에서 자고 와야 했다. 뭐 반대로 생각해보면 유혹 없이 공부에만 집중하기에 상당히 최적화된 동네라고 볼 수도 있다. (Fun fact - 캘리포니아에서는 만으로 18살이 되면 법적인 성인으로 인정되어 담배 구입이 가능하지만 술을 사기 위해서는 만으로 21살이 넘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어도 술집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언더 에이지 (Underage)라고 부른다).
미국에 사는 큰 장점 중에 하나는 말도 안 되는 자연경관이다.
새크라멘토에 사는 것을 보람 있게 만들어 준 것들 중에 큰 이유는 바로 레이크 타호(Lake Tahoe)가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새크라멘토에서 운전해서 두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레이크 타호는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두 개의 주에 걸쳐 있다. 미국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는 열한 번째로 깊은 호수라고 한다. 유난히 푸른 물색깔로도 유명한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호수가 해발 1900m 높이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한라산 높이!) 나는 이곳의 스키장에서 처음으로 스노우 보드를 배웠다. 한국에서도 중고등학교 때 스키를 여러 번 타봤었지만 타호의 날씨와 설질은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보드를 배우고 난 후에는 겨울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살았다. 눈이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게 내려 보드 타기에 너무도 완벽했던 어느 해에는 일주일에 4번씩도 타러 가곤 했다. 평일에도 수업이 끝나면 차를 달려 밤 9시까지 하는 야간 라이드를 즐기고 왔다. 새로운 세상의 발견이었다. 취미 생활의 위대 함이여. 지금도 매년 스노우 보드를 타기 위해 이 곳을 찾지만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 앞에 맨 처음 타호에 갔을 때는 정말이지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동이 있었다.
새크라멘토에 사는 동안 '아우 지겨워, 지겨워'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도 돌아보면 3년간의 이곳 생활은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 주었다. 미국 생활 초반의 외로움과 우울함을 견뎌내며 인간적으로 성장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했다. 멋진 자연 풍경이 주는 벅찬 감동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고, 내 최애 스포츠가 된 스노우 보드를 만났으며 이곳에서 만난 몇 명의 한국인 친구들은 아직도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떠날 때의 아쉬움은 없었다. 어쨌든 간에 결국 나는 철저한 '도시 소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