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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Mar 15. 2019

하루키와 류이치가 해석하는 고독

토니 타키타니를 보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겨준 문인이다.   사실 ‘노르웨이의 숲’을 만나기 전의 나는 독서와는 거리가 멀었었다.   흔히 필독도서로 분류되는 ‘데미안’이니 ‘동물농장’ 이니 하는 고전들도 줄거리만 대충 감지하고 있었을 뿐 내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있던 나는 서점에 들렀었다. (아마도 신혼여행지의 안내책자를 찾아보기 위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상실의 시대’라고 쓰인 책이 손에 잡혔는데 표지에 쓰인 원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되어 있었다.   비틀즈의 NORWEIGIAN WOODS를 너무나 좋아했던 나는 단지 그 호기심으로 내 생애 처음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 책은 며칠 후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날 때 내 가방 속에 함께 넣어졌다.   그렇게 나는 꿈같은 신혼여행 중, 아이러니하게도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성장통에 시달리는 소설 속의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만나게 되었다.   재즈바를 운영했던 특이한 이력과 마라톤을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이 멋있어 보였던 것도 큰 몫을 하긴 했지만 내 인생의 중요한 지점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만난 이후 나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분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무조건 사서 읽고 있는 광팬이 되었다.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YMO)라는 밴드의 음악은 유학시절에 알게 된 일본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카세트테이프에 실려있었다.   일렉트로 팝 장르의 테크노 사운드라는 그 당시 로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구사하는 실력 있는 밴드였다.  신씨사이저나 전자드럼,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레코딩 사운드 같은 것은 그 음반이 70년대에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충격적인 사운드였다.  심지어 이들의 음악은 단순한 댄스 뮤직을 넘어서 재즈에 기반을 둔 깊이 있는 음악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의 중심에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천재 키보드 플레이어가 존재했다.   이 사람이 ‘마지막 황제’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뮤지션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클래식에 기반을 두고 그 당시 예술 조류였던 포스트모더니즘 적인 성향과 대중성을 동시에 겸비한 음악을 구사하는가 하면 사회 운동가 로서의 면모도 갖춘 류이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으로서의 모습을 모두 갖춘 종합 선물세트 같은 사람이었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토니 타키타니’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의 요소가 듬뿍 들어있다.  이 소설을 읽고 이런 단편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글로서 표현해놓은 상상력을 영상에 전부 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 이겠지만 이치카와 쥰이 만든 이 영화는 소설을 뛰어넘는 몇 안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 역시, 소설의 첫 문장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화면 가득, 혼자로 시작된 토니가 다시 혼자로  남겨지는 스토리가 천천히 그려진다.   영화를 보며 잇세 오가타라는 배우를 잘 모르던 나는 하루키가 직접 연기한 건가 하는 착각이 든 정도로 둘은 닮아 있었다.   방랑벽을 가진 재즈 뮤지션인 아버지, 단명한 어머니와 일찌감치 단절을 한 토니는 타인과의 교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고독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방법조차 모르고 자라온다.   이러한 결핍을 결핍으로 느끼지 못하고 성인이 된 토니는 미야자와 리에가 분한 에이코를 만나게 된 후 순식간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 고독을 해결한다는 단순한 원리에 익숙한 관객들은 그들의 행복한 일상을 따라간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랑이 시작된 후 난생처음 고독의 공포에 휩싸이는 토니가 여러 각도에서 그려진다.   그녀의 옷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불씨가 된 둘의 관계는 토니가 그녀를 자신의 틀 속으로 가두고 제단 하려다 파국을 맞는다.   결국 토니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난생처음 ‘고독’이라는 감정에 실제로 빠지고 만다.

이 영화는 내레이션 기법을 이용해서 하루키의 문장을 또박또박 표현해 나간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늘 존재하는 절망과 결핍 같은 감정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내레이션의 마지막 문장을 받아 읊조리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에 이 영화가 갖는 매력이 있고 장면 장면이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글이 표현하는 가치와 영상이 표현하는 아름다움의 중간 즈음에서 타협점을 찾는 기발한 기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Solitude라는 피아노 곡 하나로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 스며있는 고독을 표현한다.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멜로디는 토니가 마주하는 감정의 느낌들을 관객에게 알기 쉽게 전달한다.   이 곡은 처음부터 혼자였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토니의 뒷모습과도 함께하고, 사랑에 빠진 후 다시 절망에 휩싸일 때도 함께하며, 나중에 남겨져 고독의 시간에 갇히는 때에도 물론 함께이다.   음악은 듣는 이의 감정의 굴곡에 따라 함께 굴절되는 예술이다.   그것은 토니의 감정에만 실리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각도로 전달된다.   이것이 어쩌면 음악이 갖는 힘이고 류이치가 표현하고자 한 고독일 것이다.


최근 우리의 주변에는 ‘쉽게 알려지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TV 드라마를 보던 유튜브를 보던, 보는 사람들의 감정을 쉽고 빠르게 자극하는 내용들이 쏟아져 나온다.   누가 보아도 웃기는, 혹은 누가 보아도 눈물이 나는 알기 쉬운 내용으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온 콘텐츠들은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일률적으로 컨트롤한다.   마치 딸기맛이나 바닐라맛의 과자들을 우리가 먹어보기도 전에 대충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듯이 브랜드의 제작자들은 절대다수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쉽고 균일화된 맛을 제공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씹으면 씹을수록 그 맛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어려운 테마의 콘텐츠는 살아남기 힘들다.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성공 여부를 가르기에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에게 빠르게 강력하게 자극을 전달하려 하는 추세임에 틀림없다.


하루키가 그려낸 토니의 고독은 읽는이 들의 감정이입에 따라 제 각각으로 해석된다.   이 소설 속에는 우리를 자극하는 단맛도 쓴맛도 없다.   그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얻는 짙고 잔잔한 감동이 남을 뿐이다.   류이치가 피아노로 표현하는 고독 역시 그 작품 자체 만으로는 그 감정이 전달되어 오기 힘들다.   영화 속의 토니를 따라가며 함께 포장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음악 속에 안기게 된다.   하루키와 류이치, 이 두 거장이 표현하려는 콘텐츠를 천천히 음미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같은 시대에 누리는 나만의 호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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