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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Jan 10. 2019

나의 옛날이야기

기억의 골목

고국을 떠나 캐나다라는 남의 나라 땅에 발을 디딘 지 17년이다.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 동안 수많은 변화를 거듭해온 한국이 점점 낯설어지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하기야 내가 떠나올 당시의 대한민국은 김대중 정부 시대였고 그 이후 여러 변화의 물결과 함께 갈고, 뒤집고, 닦고, 쓸어낸 내가 확인할 수 없었던 시간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인 땅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이민 초기에 귀 기울이던 고국의 소식은 이제 애써 찾아 듣지 않는 이상 업데이트를 해가기가 버거워진다.   가끔씩 한국에 갈 때 만나게 되는 친구들과의 대화 역시도 반가운 상봉 시간이 지나고 이야기의 각도가 일상의 화제로 틀어질 경우 난 완전히 길을 잃고 만다.   고국의 9시 뉴스를 달구고 있을 빅 이슈보다는 내가 사는 캘거리 시내의 소소한 교통사고 소식이 내 기억용량을 먼저 써버리는 것을 보면 이제 나도 이미 김동건 아나운서나 송해 선생님께서 아득하게 부르는 그 흔하디 흔한 해외동포가 다 된 것 같다.   


몇 년에 한 번씩 찾아가는 한국은 길어야 열흘 남짓한 여정이다.   무언가를 느끼고 즐길만한 겨를도 없이 급하게 볼일을 보고 급하게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급하게 그리운 식욕을 채우고는 급하게 다시 돌아오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따라서 나의 DNA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을 '고향'이라는 이미지는 좀처럼 일깨워질 틈을 찾지 못한다.   그래도 서울에만 가면 내 안의 무언가가 나침반의 침 마냥 방향을 제시하는 곳이 있다.   특별하고 선명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척들과 이웃들이 지금도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런 고향도 아닌, 그저 나의 옛날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곳이랄까.  세월이 흘러도 많이 흘러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 보이는 곳이지만 내 마음이 그 변화를 심하게 거부하는 언저리가 있는 곳이다.


장충동은 나의 70년대이다.   내가 살던 집은 지금은 상업건물로 재건축되어 있고 동네 친구였던 호근이나 정호네 집도 이미 주택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   그래도 내가 다니던 유치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고 골목 끝자락의 ‘언덕 상회’ 도 옛날 그대로 그 이름을 유지하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동네를 관통하는 길 자체가 내 기억 속에 네트워킹 되어있어 골목의 미묘한 경사까지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얼마 전 그 골목을 걸어볼 기회가 있었다.   주위의 집들과 간판들의 풍경과는 관계없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 내 몸에 전달되는 작은 충격파 만으로도 이미 나는 옛날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70년대의 그 골목에서 나와 친구들은 축구도 했고 겨울엔 썰매도 탔다.   게임기도 인터넷도 없던 우리는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엄마가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부를 때까지 무조건 골목에 나와 무슨 놀이던 장난이던 하고 있었다.   앞집에 살던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는 아침이면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거꾸로 걷는 이상한 풍경도 있었다.   지금은 물론 없지만 집 근처엔 사이비 종교 회관 이 있어 주말이면 밤늦게까지 불빛이 새어 나오고 무슨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외삼촌의 친구였던 내 중학교 담임 선생님은 가정방문의 명목으로 우리 집에 와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는 바람에 내가 업다시피 하여 모셔다 드렸던 그 골목은 길게만 느껴졌었다.   신문을 돌리던 친구를 따라나선 새벽의 골목길도 기억에 선하고 아버지와 함께 남산 약수터에서 사 먹은 계란 프라이의 기름 냄새도 여전히 내 후각의 어딘가에 각인되어있다.  


비록 살았던 동네는 아니지만 청운동 효자동 언저리 역시 내게는 소중한 옛날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그 동네에서 다녀 어릴 적 친구들이 많이 살았고 이런저런 일로 어른이 된 후로도 많이 찾게 된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그 동네는 내가 꿈꾸는 그리고 붙잡고 싶은 서울의 모습인 것 같다.  강남의 화려함과 세련됨이 세계 속의 서울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면 내게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바로 이곳이다.   삼청동의 길상사는 지금도 어머니가 다니시는 절이다.  고급 요정 대원각과 백석을 사랑한 여인, 그리고 법정 스님과 무소유로 이어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깃든 곳이다.    법정의 책처럼 맑고 향기로운 이곳은 경전에 들어서는 것 하나로 시간이 멈추어 선다.  삼청동 고개를 넘어 청운효자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강남에서는 보기 힘든 좁은 골목들이 여러 갈래로 이어져 있다.    어린 시절 나의 악동 친구들과 날마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말타기를 하던 곳이고 동네 시장을 돌아다니며 떡볶이를 한두 개 사 먹으며 오뎅 국물을 하염없이 퍼마시던 곳이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온데간데없고 경복궁을 찾아오는 중국인 관광객 들과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수많은 골목 카페들이 나의 옛날을 재포장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잠깐씩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곳 캐나다로 돌아오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부모 형제들과의 이별의 아쉬움은 제쳐두더라도 내 몸이 원하는 고국땅이 끄는 중력의 힘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어디든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곳 캘거리가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곳의 공기와 냄새와 감촉을 내 몸 어딘가가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와 우리 아이들이 나름 중심을 잡고 살고 있는 이곳이 제2의 고향이 된 셈이다.


사람에게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깨닫는 순간에 그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한글을 깨치는 것도 있고 자전거나 운전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압구정동에서 그 옛날의 참외 밭을 발견할 수는 없다.  장충동이나 청운동 효자동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을 돌이킬 수 있는 것처럼 느끼고,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변하기 전의 상태로 붙잡으려는 나의 노망과도 닮은 로망이 오늘따라 아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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