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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Jun 22. 2019

에그 스탠드

옛날에 우리 집 부엌 찬장 안 구석에는 ‘에그 스탠드’라는 물건이 다른 그릇들과 함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계란 받침대를 굳이 에그 스탠드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집에서 그렇게 불러왔었기 때문이다.   소주잔보다는 작고 위스키 샷 잔 보다는 조금 큰 이 물건은 지금은 한국에서 꽤나 대중화되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웬만한 사람들은 그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그것은 우리가 자주 먹는 삶은 계란을 어떤 식으로 즐기느냐를 규정하는 문화 콘텐츠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에그 스탠드를 이용해 계란을 먹기 위해선 다른 준비물도 필요하다.   우선 계란을 받침대 위에 세우고 위쪽을 톡톡 쳐서 잘라내기 위해선 나이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익은 계란 위에 적당한 양념을 치기 위해선 주둥이가 좁은 소금 후추병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계란을 퍼 먹기 위한 아주 작고 귀여운 스푼이 필요하다.   삶은 계란 한 알을 먹기 위한 우리 집 밥상은 이미 양식당 비슷한 풍경이 만들어졌었다.   그리고 그 흔한 삶은 계란을 하나 먹는 상황에서도 요령이 필요했고 격식을 차려야 했다.   우선 스푼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나이프로 잘라내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기술과 힘 조절이 필요하다.   소금과 후추는 언제나 아버지가 먼저 사용하게 하는 테이블 매너도 중요하다.   에그 스탠드가 좋은 점은 계란이 완숙이던 반숙이던 심지어 미숙이든 간에 깨끗하고 우아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 파먹어 껍질만 남은 계란을 거꾸로 뒤집어 스탠드 위에 올려놓는 것 역시 우리 집의 오래된 장난이고 우리 형제들의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계란 껍데기의 잔재를 바닥에 남기지 않고 우아하게 천천히 먹을 수 있게 하는 이 물건 덕분에 적어도 우리 집에선 삶은 계란은 ‘까먹는’ 음식이 아니라 ‘퍼먹는’ 음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뱃속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같지만 열차여행을 하며 칠성사이다와 함께 까먹었던 삶은 계란과 스탠드로 떠 받드려 진 계란은 분명 다른 음식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동양의 최빈국에서 아버지는 유럽으로의 유학을 감행하는 행운을 얻었다.   할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고생이란 고생은 마다하지 않고 하나뿐인 아버지를 애지중지 키우셨다.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에게 넓고 밝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할머니의 꿈이 아버지의 꿈으로 전달된 시기였을 것이다.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조그마한 포목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버지가 유학을, 그것도 미국도 아니고 영국으로의 유학을 떠나게 된 정확한 배경은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그 당시 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일종의 국위선양 같은 것으로 태극기를 들고 배웅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우리가 들은 유학시절의 학교 공부나 선생님과 교우들과 같은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어떤 경위였는지 처음 영국에서 시작한 유학을  독일에서 마치게 되었다는 것, 독일의 바이엘 아스피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용돈을 벌기 위해 꽃배달도 해 봤다는 것,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 우연히 사우디의 왕족과 친구가 되어 상상할 수 없는 호강을 누리며 여행을 해본 이야기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재미있는 에피소드 중에는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담은 고추장을 아버지에게 배로 부친 이야기가 있었다.   그 당시는 송금은 고사하고 국제우편 편지까지도 검열당했던 시절이었는지 비닐봉지에 겹겹이 싼 외화를 고추장 속에 숨겨서 보내면서 편지에 그 내용을 직접 쓸 수 없었던 할머니가 소포를 받은 아버지가 무사히 그 돈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고추장은 열어서 아래 위로 조심스럽게 저어서 보관해라’라는 암호 아닌 암호를 편지에 굵은 글씨로 적어 보내셨고, 소포를 받은 아버지가 답장으로 보내는 편지에 역시 굵은 글씨로 ‘보내주신 고추장은 잘 저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써서 보낸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영국에 처음 도착한 아버지는 전형적인 영국 할머니가 운영했던 하숙집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듣도 보도 못한 동양의 조그맣고 불쌍한 나라에서 건너온 동양인 청년을 하숙생으로 맞이한 꼬장꼬장한 영국 할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버지는 그 할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하셨고 난 그때마다 왠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미지가 떠올랐던 것 같다.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영국 여자의 한계였던 것 같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흔히 우리가 영국 하면 떠올리던 ‘젠틀 맨쉽’이라는 소위 기본소양과 매너와 품위와 상식 같은 것 중 많은 부분을 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버지는 자신이 머물던 방 청소만큼은 부지런히 했고 그런 아버지를 할머니는 무척 흐뭇해하셨다고 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생소함의 차원을 넘어 다른 별나라의 풍경이었을 아버지는 그런 문화적 충격과 이질감에 당황했다기보다는 어린 아기가 세상과 접촉하듯 서양사회의 디테일을 그대로 흡수하고 또 스펀지처럼 젖어들었을 터이다.   그중에서도 아버지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끈 것이 식사 예절이었다.   하숙집에서 제공된 식사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빵 한 조각부터가 신기했을 것이다.   접시 위에 놓인 소위 말하는 서양 음식 들은 그 곁에 놓인 도구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입에 넣어야 했겠지만 도무지 그 사용방법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어린아이를 테이블에 처음 앉히는 엄마처럼 할머니는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음식의 종류는 고작해야 빵 한 조각과 삶은 감자, 그리고 계란이 전부였다고 하지만 그것들을 직접 손으로 만지지 않고 도구로 먹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은 마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최첨단 지식과도 같았을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회사를 다니며 가정을 이룬 아버지는 그 당시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나와 형제들은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라야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함께 아침밥을 먹는 자리였다.   내가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방법을 언제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우리 집 밥상에 언제나 양식이 올라온 것은 물론 아니었고 가끔 아침식사가 소위 말하는 ‘브렉퍼스트’가 될 때가 있었다.   토스트와 계란, 스팸과 버터와 잼, 그리고 콘프레이크와 우유, 혹은 크림수프가 그것이었다.  (유학시절 허구한 날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던 아버지는 감자를 싫어하셨다.) 기억이 잘은 나지 않지만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줄곧 나는 아버지의 손놀림을 주시하며 아버지를 거울처럼 따라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계란 위에 소금을 치는 것을 기다려 우리 형제들도 순서대로 소금을 뿌렸다.   토스트에 버터를 바를 때 나이프에 붙는 버터의 양과 칼의 각도까지도 흉내를 냈다.   양손에 쥔 포크와 나이프로 스팸 한 조각을 썰때도 절대 접시에 칼이 끌리는 소리를 내서도 안 되고 수프를 떠먹을 때도 스푼을 안에서 바깥쪽으로 움직여야 하고 특히 식사 중에 포크와 나이프를 놓을 때와 다 먹은 후에 놓는 예절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갔었다.   아버지와 그렇게 아침식사를 함께할 때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간단한 영어 한마디를 주고받았다.   아마도 아버지 기억 속에 유학시절 하숙집 할머니와 마주 했던 식사시간이 오버랩되셨을 것이다.   영어라고 해 봐야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   “Fine Fine!”   이것이 전부이다.   아버지가 How are you로 시작하면 우리가 Fine thank you, and you?   하면 아버지가 Fine Fine으로 끝나고 우리가 먼저 시작하면 우리에게서 끝난다.   물론 아버지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표현들을 얘기해 주셨던 것 같지만 워낙 주위가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했던 나는 오로지 그 How are you/Fine Fine 만을 반복했었다.   그 당시 아버지와의 아침식사에 가끔 올라온 것이 삶은 계란이 둥그렇게 올려진 ‘에그 스탠드’였다.   아버지는 매번 계란 윗부분을 잘라낼 때마다 어떻게 해야 껍질 부스러기를 안 떨어뜨리고 제거할 수 있는지 시범을 보이셨다.   우리 형제는 마치 찰흙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을 배우듯 아버지가 잡은 나이프와 그것이 계란 껍데기를 산뜻하게 날리는 손놀림을 그대로 따라 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김정운 교수가 쓴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에서 차범근이 아끼는 물건으로 계란 받침대가 소개된 것을 읽었다.   물론 축구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 물건이 차범근 축구교실 안 그의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독일 아침식사에 필수로 나오는 삶은 계란을 받치는 스탠드 하나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니 상당히 의외였다.   아마도 차범근의 축구 인생을 동반한 가족과 그 가족을 애워싸는 소중한 이야기가 담긴 이 주방기구가 그에게 그만큼 행복한 기억이었으리라.   독일에서 뛰는 동양인 축구선수로서 수많은 기록을 남긴 그에게는 수많은 메달과 트로피와 그리고 축구공, 유니폼 등이 있었겠지만 모든 것을 제치고 이 조그맣고 존재감 없는 계란 받침대가 그것도 ‘남자의 물건’이라는 다소 이상한 주제에 서슴지 않고 소개된 것을 보면 어쩌면 가장 차범근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행복은 매 순간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가끔은 과거의 소중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도움을 줄 때가 있다.   지금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지만 어릴 때 너무 좋아해서 구입했고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그 당시 아이돌 가수의 레코드도 있고, 연도와 날짜가 들어있어 무언가를 잔뜩 써 놓은 과거의 수첩들이 있고, 책장 밑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졸업앨범이나 사진첩들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들 중 내가 간직하고 있는 시계와 지갑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당연하고 확실한 물건이다.   하지만 ‘에그 스탠드’는 좀 다르다.   물론 어릴 때 우리 집 밥상 위에 하나씩 놓여있던 그 에그 스탠드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지는 않다.   어떻게 생긴 것이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하다.   다만 그 당시의 그 아침 풍경과 나이프를 잡은 아버지의 손 모양과 한입한입 떠먹을 때마다 입에서 느껴진 반숙의 부드러움은 내 가슴이 먼저 기억하고 있다.   어른이 되고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오면서도 주방에는 에그 스탠드를 하나씩 사서 보관해 왔다.   지금 우리 집 가족들 에게도 삶은 계란은 당연히 에그 스탠드이다.   패밀리의 유산 까지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기억과 더불어 자리하는 향긋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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