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줍은 포틀랜드 맘 Oct 05. 2022

포틀랜드에서 사는 법

포틀랜드 육아생활 :  봉숭아 물들이기



니코의 절친 윌은 패션에 민감한 아이다. 윌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팬데믹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 비로소 윌을 백화점 아이옷 섹션에 데려갔더니 아이가 그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 왜 나 여기 안데려왔었어? 여기 너무 좋아" 하면서 옷을 고르느라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우리 딸 니코는 백화점에서의 집중시간 3분, 딱히 자신만의 패션 고집도 크지 않아 내가 호들갑을 떨며 ‘이거 너무 이쁘지 않니?” 하면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는 편.

그래도 친구의 영향은 가끔 취향을 넘어서는 법. 남자아이이지만 원피스와 컬러풀한 색상을 좋아하는 윌이 하는 것은 뭐든 좋아보이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른 윌을 너무 부러워하며 자신도 해달라고 하는데, 친정엄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어린시절 우리 엄마는, 손톱도 숨을 쉬어야 하고, 아세톤에는 독한 화학성분이 많다며 단칼에 거절했었다) 나는 대신 니코에게 테이블에 앉아 수성물감으로 손톱에 색을 칠하자고 했고, 다행히 니코는 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집 봉숭아 

그래서 이번 봄, 나는 특별히 니코를 위해 우리집 뜰에 봉숭아를 심었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갈 때마다 풍성하게 피어있던 봉숭아가 얼마나 좋았던지. 하루종일 그 앞에서 꽃을 따고 있는 내게 외할머니가 다가와 꽃이 진  자리에 남아있던  씨앗을 손에 담아 종이로 꼭꼭 싸서 주셨다. “아파트 앞 화단에 가서 심어라.” 하고.

내 기억으로 봉숭아는 생각보다 씨앗을 많이 품고 있고, 외할머니가 굳이 봄마다 따로 심지 않더라도 화단을 알아서 쉽게 점령해버렸기에, 나 역시 조심스레 씨앗을 몇 개만 심었더니 이번 해에는 달랑 2포기의 봉숭아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지 “안그래도 새들이 거기 모여 뭔가를 쪼아 먹고 있던데”) 그래도 니코 손톱을 물들이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은 양으로 꽃이 송이송이 매달려 있었다.

며칠 전 이미 봉숭아 물들이기를 계획하고(엄마들은 알 것이다. 즉흥적으로 ‘봉숭아 물들이기 하자!’고 했다가 ‘앗, 백반이 없네. 못하겠다’ 하고 나면 아이들의 좌절감과 땡깡을 받아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가 생색도 못내고 비극으로 끝나는 하루가 되기 십상이다. 예비 부모 혹은 이모 삼촌들이여, 아이들과의 이벤트에는 항상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백반' ‘명반'이 무엇인지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았다. ‘Alum’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Alum은 음식 조미료로도 쓰이는 모양인지, 슈퍼마켓 조미료 섹션에서 찾으면 된다고 한다. 내가 처음 보는 이름인 걸 보니, 어쩐지 슈퍼마켓 몇 군데는 돌아야 할 것 같아, (몇 달러 비싸겠지만) 고민하지 않고 아마존에서 구입. 


아이와 함께 꽃과 잎을 따고 미니절구에 넣었다. 이맘때쯤 아이들은 뭐든지 새로운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하므로 계란 깨기, 베이킹 준비하기 등은 우리 딸에게 맡긴지 꽤 됐다. 살짝 칭찬까지 덧붙여주면 얼굴 가득 자신감까지 번지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라서 테이블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 쯤은 충분히 견디어낸다.

문제는 이 어린 만 4세의 손톱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하면 침대와 침구를 봉숭아물로부터 잘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린이 니트릴 장갑을 사서, 손가락만 가위로 잘라내고 잃어버리지 않게 일렬로 늘어놨다. (속으로 드라마 ‘괴물'이 생각나네, 잠깐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했다-범죄물 팬 아니랄까봐) 조심스럽게 손톱 위에 봉숭아를 올리고, 움직이지 않게 잘 손가락 장갑들을 끼운 후 머리끈으로 너무 조이지 않게 묶어줬다. 

결과는? 애를 재운 후 20분 마다 방에 들어가 혹시라도 손가락에 피가 통하지 않을까봐 체크하고 또 체크하고.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생각하는 순간, 딸이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나서 운다. 결국 세시간도 안되어 불편한 손가락에 자유를 주고 상황 종료.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보니 살풋 예쁜 오렌지 색이 들어 있었고 니코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더 예쁘게 해준다며 딸을 꼬여 그날 밤 한 번 더 도전해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머리끈 대신 반창고를 사용했는데 아이도 불편해하지 않아 나도 조금 편하게 밤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우리 아이의 손가락은 짙은 주홍색!


딸만큼이나 나도 니코의 손톱이 주홍색으로 물드는 것을 못견디게 보고싶었다. ‘포틀랜드’ 사람들에게 ‘봉숭아 물들이기'를 보여주면 얼마나 부러워할까 싶어서 더더욱. 내 머릿속엔  ‘이것이 진정한 K 뷰티의 시작'이라는 영어 헤드라인이 넘실거렸다. 환경친화적인 일상을 추구하는 포틀랜드의 이웃들에게 한번 쓰고 버리는 마스크팩 말고, 꽃을 빻아 손톱에 색을 넣는 ‘조국’의 전통 K 뷰티를 자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겠다 싶었다. 남편은 그 새를 못참고 니코가 다니는 몬테소리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메일을 보내어 ‘한국전통 손톱 염색'이라고 자랑하며 ‘수업 중 소문내기’를 독려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이 친구의 부모들이 니코의 손톱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우리는 스킨에 물든 컬러는 얼마 후면 없어질 것이고, 이것은 1천년 전부터 시작된 한국의 문화이며, 얼마나 오가닉하고 환경친화적인 문화인지, 무엇보다 대부분의 한국 어린이들에게는 이와 관련한 여름방학의 추억 하나쯤은 있다고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결국 이렇게 니코와 나는 포틀랜드의 한 학교에서 K 뷰티 비공식 홍보대사로 적극 활동하게 됐다. 다음번엔 엄마들에게 한국 페이스팩이라도 하나씩 돌려야 할까? 


** 친구 부모들에게 정보를 줄까 해서 이것저것 영어 검색을 해보았는데, 미국 얼루어 디지털 매거진(https://www.allure.com/story/balsam-flower-nail-dye-ancient-korean-technique)에 올라온 아주 좋은 글을 발견하게 됐다. 아마도 K팝 팬인듯한 에디터는 한 한국 뮤지션의 손톱을 보고는 이에 고무되어 미국에 있는 유명 한국출신 뷰티업계 종사자들을 인터뷰하고 역사까지 파고드는 좋은 글을 써놓았다. 전직기자 더듬이를 활용해 인터넷으로 이 분을 파고들어보니, 이 언니 각종 잡지의 뷰티 라이터로, 한국문화 팬임이 확실. 심지어 최근엔 한국에도 방문하신듯. 바로 트위터 팔로우! 

작가의 이전글 포틀랜드, 여자들이 만드는 위스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