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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Jul 10. 2021

여행을 느끼고

[사진과 단상] 거제도

'여행은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난 6월 중순 아내가 4개월 전부터 예약해둔 거제도의 지평집이란 숙소가 있어 2박 3일간 거제로 떠나게 되었다. 조금 이른 시즌이지만 나름대로 마음을 먹고 떠나는 여름휴가였고 오래간만에 당일치기 아닌 여행이라 며칠 전부터 마음이 들떴다. 특별한 기대까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떠난다는 사실이 마음을 간질였다. 사무실에 앉아서도 거제만을 생각했다. 


그렇게 거제에서 2박 3일을 보냈다. 마지막 목적지가 세종 우리집으로 정해진 그 순간까지 여행임을 인지하지 못한 여행, 내비게이션이 세종까지 펼쳐진 약 300km의 길을 안내하기 전까지 온전한 몰입이었다. 몇 주가 지나서까지도, 거제도 여행의 기억은 빨갛다 못해 검게 타버린 내 팔보다도 나를 신경 쓰이게 했다.


김영하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여행은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이 명제를 참고하자면, 나는 가끔은 꽤나 훌륭한 시공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과거와 미래의 속박에 묶여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근교에 당일치기로라도 다니려고 노력했으나 자세한 연유는 모르지만 충분한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과거와 미래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공간을 맞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고 온전히 현재에 몰입했다. 새벽에 숙소에서 눈을 떴을 때 햇살이 옅게 묻은 연파랑빛 바다와 평화롭게 철썩이는 파도 소리. 작은 어촌 마을 주택을 개조한 흰 카페, 벽에 쓰인 이상의 시를 읽으며 맞은 바닷바람수국과 금계국이 널리 만개하고 새끼 고라니가 지나던 지세포성에서 내려다본 노을빛 바다내게 다가온 훌륭한 순간들을 온몸으로 느껴 조금도 잃지 않고 마음에 담았다. 


나를 현재에 데려다 놓아줄 순간과 경험. 끝나고 나서야 '아, 여행이었다.' 느끼게 하고, 어제의 과오와 내일의 불안이 방해하는 오늘을 나에게 되찾아주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주는 그런 여행.

내가 거제에서 보낸 시공간, 그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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