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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Feb 05. 2022

멀리 닿을수록
세상은 좁아지고

 작은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다닌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한 중고차 매매단지에서 맞지 않는 어른의 옷을 입고 어설프게 아는 티를 내며 차를 구매했다. 집까지 1시간 남짓 걸리는 길을 어색하게 운전하여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을 흘리고 왔다. 그때부터 차에 앉아 먼 길을 나설 때면, 어린 시절과의 단절을 느낀다. 시간을 역행하지 못하는, 유년시절에서 직선으로 뻗어 나온 길 위를 달리고 있음을.


 초등학교 때는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사거리를 지나 중랑천을 건너 공릉동으로 향하는 길이 참 멀었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육교는 아득하게 높았고, 그 아래로 끝없는 물길이 흘렀다. 나의 키는 지금보다는 훨씬 작았으니 아마도 다리 난간보다 조금 작거나 약간 큰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겐 바다와 같았다. 다리를 건너는 일은 대개 우리 동네에 없던 안과에 가거나 외식을 하러 감을 의미했다. 항상 부모님과 함께 했고, 혼자서는 없는 길이었으며 혼자 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경이 1km 남짓 되는 동심원이 나의 세상이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매일 같이 성북역 육교를 넘었다. 친구들과 용산, 종로 등지를 수시로 쏘다녔다. 자주는 아니었으나 종종 즈음은 되었다. 점점 보고 듣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다. 취향이 확고해지고 조금은 아는 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육교를 넘어 버스까지 타고 학교를 다녔다. 처음 듣는 이름의 동네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었고, 넓어진 삶의 반경은 버스와 전철을 타고 나가야 하는 곳에 놀이터를 만들었다. 어딘가로 혼자 향하는 일은 어색한 기색 없이 당연해졌다. 부모님의 애정 어린 눈빛이 더 이상은 반갑지 않은 나이였다.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는 나이였고, 나름대로 나의 세상은 넓어졌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어디로든 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십대는 금세 찾아왔고, 방종과 자유의 줄을 탔다. 시선은 서울을 벗어나 전국 각지와 세계 각국을 향했다. 이때부터 일생 제일의 소일거리인 지도보기를 시작했다. 무궁화호 밤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기도 했고, 내일로를 타고 전국을 돌며 봉사활동도 했다. 나의 세상은 국한되는 지점이 없었다. 돈과 시간의 제약이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막힘이 없었다. 욕망하는 바를 품어 이룸에 작은 행복감과 성취감이 쌓였다. 물리적 목적지든 정신적 목적지든, 욕망과 성취의 선순환을 배웠다.


 이십대의 마지막 자락에서는 나만의 자가용을 타고 전국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자리를 잡고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 것을 명분삼아 내 차를 마련했다. 사실은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나의 세상은 어디든 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었고, 시외버스와 철도 시스템에 가로막히지도 않았다. 작은 차 한 대로 가보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갔다. 차에 잠깐 앉았다 내리면 어디든 도달하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었다. 욕망은 곧 성취를 넘어섰고, 방종은 곧 자유를 넘어섰다. 점점 바라던 곳에서 바라던 바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바랐다고 생각했는데, 실망하고 감흥이 없었다. 진짜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기도 했다. 진짜 바랐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욕망하기만 했고 허무감이 커졌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일까. 욕망은 여전한데 반복되는 괴리는 행동을 멎게 했고 무언가를 이루려는 생각을 쉽게 차단한다.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길도 충분히 멀다. 지금 살고 있는 작은 동네, 하물며 가만히 집에 있어도 하루가 금방 간다. 세상의 끝에서 얻은 단 꿈에 젖어 살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흘러 원점으로 돌아왔다. 시간 축은 직선으로 뻗은 길이었는데 공간은 그렇지 않았다. 1km 남짓 되는 동심원이 다시 내 세상이 되었다. 물론 이제는 훨씬 멀리 닿을 수 있다. 당장 내일이라도 100km 넘게 떨어진 도시로 달려갈 수 있다. 앞만 바라보고 있으면 닿을 수 있다. 하지만 큰 기대를 품지 않는다. '뭐하러', '굳이', '나중에', '귀찮게', '됐다'로 구성한 문장으로 나는 물론 남까지 설득한다.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하고, 느끼기 위해 힘을 내보자고 다짐해도 도통 힘이 나지 않는다. 다시 좁아져버린 내 세상에 대체로 순응하고 있지만 가끔은 원망하게 된다.


 그나마 원망이라도 하기에, 희미한 절터같은 내 존재를 손으로 쓸어본다. 원망은 정말 두려운 무언가를 목도해버릴까봐 발현하는 방어기제 정도인가. 무한히 뻗어가던 세상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새로운 일에 기대를 품지 않으며, 좁은 세상에 원망조차 하지 않는 스스로를 목도하는 일. 그 후엔 뻗어가는 시간의 직선만 남고 공간은 0으로 수렴할 것이다. 예전에는 내 존재가 그토록 선명했다. 무엇을 하고 싶고,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지, 뺨을 타고 스치는 실바람에도 내 존재가 그려졌다. 그 선명함이 내가 욕망하는 것들을 불러일으켰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했으며, 나아가는 만큼이 내 세상이 되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이제는 지도를 펼쳐 작은 지점 어디 하나라도 궁금해하려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미세한 자극조차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라도 발걸음을 옮겨 내 세상의 반경을 넓혀보려 애쓰고 있다. 멀리 닿을수록 세상이 좁아졌다는 허무에 가득 찬 문장은 지우고, 세상을 가둔 틀을 깨기 위해. 비록 기대가 없고 그 성취가 작을지라도 다시 마음을 동하게 하려고 애써본다. 단 한 줄이라도 나의 문장을 적어본다. 지금의 나를 더 크게 원망하고 다시 작은 욕망이라도 품도록 내 손으로 쓰고 마음에 새긴다. 반경 1km 남짓한 동심원 속에서도 반짝이던 시절은 다시없을 테지만, 반짝이던 마음을 작게나마 간직함이 최선의 책무임을 잊지 않으려 오늘의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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