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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Jun 05. 2022

야채곱창에 위스키 한 잔

며칠을 이어진 후덥지근한 공기를 초여름 부슬비가 식힌 어느 저녁

적적하니 집에 아무도 없어 배달이나 시켜먹을까 한참을 생각한다


깻잎순, 양배추, 당면과 입 안 얼얼하게 볶아 들깨가루를 뿌리고

반쯤 먹었을 때 갓 데워 따끈한 흰쌀밥을 적절히 버무려 먹던 야채곱창이 생각난다


이유모를 어린 논쟁들로 얼굴을 붉히며 서로를 지적하면서

첫사랑을 잃었다고 낄낄대다 엉엉울다 연거푸 소주잔을 들이밀면서

양복입은 퇴근길에 남모를 아픔 숨긴 채 허허실실 난리법석을 떨면서

야채곱창 한 접시 앞에서 무수한 시간을 새겼다


야채곱창 1인분을 캄캄한 집으로 배달시키고

요즈음 그렇게나 궁금했던 위스키를 꺼내어

구색 맞출 예쁜 잔에 조금 따라본다


샷으로 한 잔 음미하고, 온더락으로 또 한 잔 음미하는데

당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음미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위스키는 내 취향이 아닌가 생각해보는데 곱창이 도착한다


깻잎순과 들깨가루는 보이지 않고

가느다란 당면 대신 요새 유행한다는 널찍한 당면이 가득 

맛이 없는 것은 아닌데 이 집은 내 취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나는 오늘 네 생각이 나서 야채곱창을 시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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