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에 대하여
지난주 일요일이 제 의붓오빠의 사십구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날에 제 분노가 폭발해서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죠. 언젠가는 터졌어야 할 그 사건은 굳이 제 에피소드로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건은 아마도 제 의붓오빠가 이제 받아들이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보호해주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어쩌면 제가 믿는 신이 그만하라고 벌을 내린 걸 수도 있습니다. 흔히 죽음의 5단계라고 하죠. 오늘은 그 단계 중에서 수용을 말하고자 합니다.
죽음의 5단계는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가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선보인 심리학적 모델이라고 합니다. 보통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이라는 순서로 받아들인다고 하더군요. 저는 제 형제의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협상도 해봤지만,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울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표출한 감정의 순서는 많이 뒤 바뀌어 있지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울에서 분노로 표현했으니까요.
저는 일종의 보상 심리를 기대해 왔습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왔던, 그 뙤약볕의 황무지 같은 삶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제 가족만큼은 그렇게 되질 않기를 바랐지요. 그래서 종종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혹은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게 저는 당당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제 삶의 여유를 바꾼 것이 제 커리어이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게 제 성벽 안의 사람이라고요. 고로 제가 성공하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법칙이 깨졌죠. 제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오라비가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분노하고, 또 분노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믿는 신과 협상도 해봤고요. 끝내 그게 잘 되지 않아 우울이라는 상태에 빠져 있었죠. 제 보상 심리가 철저히 무시된 겁니다. 세상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이제야 깨달았네요.
저에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할 때의 태도랄까요. 일할 때의 제 자아에겐 불가능이란 절대 없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해야 하고,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일을 엄격히 대해보니 어느새 제 일상에서의 자아까지 전염된 것 같습니다. 전염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네요. 저는 평상시에 그렇게 빡빡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게으르고 여유롭지요. 하지만 일할 때 누구보다 기준이 엄격해서 그런 건지, 그렇게 햇수로 6년을 살아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생각보다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줬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생물학적 차이를 이기기 위해 킥복싱을 배우면서 거구의 남성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제 오라비의 죽음도 부정하다 보면,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게 제 자만심이었습니다. 세상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라비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제가 살아온 삶을 안다면, 나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분노했고 부정했지요. 하지만 그 확신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제 그 무엇도 확신하면 안 되겠더군요. 확신을 하면 할수록 불확신 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만, 제게 허락된 확신은 제가 바라볼 방향과 내 사람들을 끌고 갈 방향이 전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믿는 신은 언제나 제게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주지요.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로 다쳤고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그와 더불어 이제야 오라비의 죽음까지 수용하게 됐습니다. 오라비는 다시 제가 믿는 신에게로 돌아갔음을, 이제 이 세상에 없음을 완벽히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간다는 것을, 인생은 내가 주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제 피와 뼈에 새겼습니다.
남들은 형제가 죽었는데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살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부모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죽은 제 오라비가 바라왔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십구재에 참석하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정신을 차려야 제 부모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게 무력이든, 돈으로든요. 이제 저는 제가 장녀라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성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 에너지와 따뜻함을 나눠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 인생을 씹어댈지언정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게 포탄질을 하면 방어사격을 할 뿐, 먼저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공격을 했을 때는 그들도 단단한 각오를 해야겠지요. 방어사격은 곧, 제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날릴 핵 미사일이기 때문이지요.
예전에는 제 인생을 평가질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화가 났습니다. 저보다 치열하게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평가질이나 해대고 있는지 분노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오만하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남의 인생을 평가하는 사람은 결단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걸요. 남들이 들어주지 않으니, 남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토를 달고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제 신경을 끄려고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니 제가 봐야 할 방향이 확실해졌습니다. 이제 뒤를 보지 않고 달려 나가야 합니다. 죽은 제 오라비가 엄마의 꿈 속에 나타나 흙 속에 무언가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이만하면, 제 잘못을 용서해 준 것 같네요. 이제 그만 후회해도, 그만 부정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믿는 신이 잘 데리고 계시겠지요.
오늘도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천주 성부 아버지께서는 저의 가장 소중한 걸 가지고 가셨으니, 제가 올라갈 힘을 주시겠지요. 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라고 비난하신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제 외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제가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아버지께서는 그래서 저를 순종시키신 게 아닌가요.
아버지께서 저를 그간의 예언자들과 견줄만한 자식이 되도록 만들어 주세요. 저는 이제 진정으로 당신의 자식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제 오라비도 데려가셨으니, 언제든 저를 데려가셔도 그저 순종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