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트라 Mar 21. 2024

저는 이제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수용에 대하여


"나는 여태까지 치열하게 살아왔어."



지난주 일요일이 제 의붓오빠의 사십구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날에 제 분노가 폭발해서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죠. 언젠가는 터졌어야 할 그 사건은 굳이 제 에피소드로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건은 아마도 제 의붓오빠가 이제 받아들이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보호해주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어쩌면 제가 믿는 신이 그만하라고 벌을 내린 걸 수도 있습니다. 흔히 죽음의 5단계라고 하죠. 오늘은 그 단계 중에서 수용을 말하고자 합니다.




죽음의 5단계는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가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선보인 심리학적 모델이라고 합니다. 보통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이라는 순서로 받아들인다고 하더군요. 저는 제 형제의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협상도 해봤지만,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울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표출한 감정의 순서는 많이 뒤 바뀌어 있지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울에서 분노로 표현했으니까요.


저는 일종의 보상 심리를 기대해 왔습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왔던, 그 뙤약볕의 황무지 같은 삶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제 가족만큼은 그렇게 되질 않기를 바랐지요. 그래서 종종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혹은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게 저는 당당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제 삶의 여유를 바꾼 것이 제 커리어이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게 제 성벽 안의 사람이라고요. 고로 제가 성공하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법칙이 깨졌죠. 제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오라비가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분노하고, 또 분노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믿는 신과 협상도 해봤고요. 끝내 그게 잘 되지 않아 우울이라는 상태에 빠져 있었죠. 제 보상 심리가 철저히 무시된 겁니다. 세상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이제야 깨달았네요.


저에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때의 태도랄까요. 일할 때의  자아에겐 불가능이란 절대 없습니다.  되면 되게 해야 하고,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일을 엄격히 대해보니 느새  일상에서의 자아까지 전염된  같습니다. 전염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네요. 저는 평상시에 그렇게 빡빡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게으르고 여유롭지요. 하지만 일할  누구보다 기준이 엄격해서 그런 건지, 그렇게 햇수로 6년을 살아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생각보다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줬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생물학적 차이를 이기기 위해 킥복싱을 배우면서 거구의 남성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제 오라비의 죽음도 부정하다 보면,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게 제 자만심이었습니다. 세상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라비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제가 살아온 삶을 안다면, 나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분노했고 부정했지요. 하지만 그 확신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제 그 무엇도 확신하면 안 되겠더군요. 확신을 하면 할수록 불확신 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만, 제게 허락된 확신은 제가 바라볼 방향과 내 사람들을 끌고 갈 방향이 전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믿는 신은 언제나 제게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주지요.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로 다쳤고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그와 더불어 이제야 오라비의 죽음까지 수용하게 됐습니다. 오라비는 다시 제가 믿는 신에게로 돌아갔음을, 이제 이 세상에 없음을 완벽히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간다는 것을, 인생은 내가 주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제 피와 뼈에 새겼습니다.


남들은 형제가 죽었는데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살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부모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죽은 제 오라비가 바라왔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십구재에 참석하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정신을 차려야 제 부모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게 무력이든, 돈으로든요. 이제 저는 제가 장녀라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성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 에너지와 따뜻함을 나눠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 인생을 씹어댈지언정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게 포탄질을 하면 방어사격을 할 뿐, 먼저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공격을 했을 때는 그들도 단단한 각오를 해야겠지요. 방어사격은 곧, 제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날릴 핵 미사일이기 때문이지요.


예전에는 제 인생을 평가질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화가 났습니다. 저보다 치열하게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평가질이나 해대고 있는지 분노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오만하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남의 인생을 평가하는 사람은 결단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걸요. 남들이 들어주지 않으니, 남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토를 달고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제 신경을 끄려고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니 제가 봐야 할 방향이 확실해졌습니다. 이제 뒤를 보지 않고 달려 나가야 합니다. 죽은 제 오라비가 엄마의 꿈 속에 나타나 흙 속에 무언가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이만하면, 제 잘못을 용서해 준 것 같네요. 이제 그만 후회해도, 그만 부정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믿는 신이 잘 데리고 계시겠지요.


오늘도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천주 성부 아버지께서는 저의 가장 소중한 걸 가지고 가셨으니, 제가 올라갈 힘을 주시겠지요. 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라고 비난하신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제 외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제가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아버지께서는 그래서 저를 순종시키신 게 아닌가요.

아버지께서 저를 그간의 예언자들과 견줄만한 자식이 되도록 만들어 주세요. 저는 이제 진정으로 당신의 자식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제 오라비도 데려가셨으니, 언제든 저를 데려가셔도 그저 순종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양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과를 다닌 지 3개월 됐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