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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Feb 29. 2024

정신과를 다닌 지 3개월 됐습니다.

삶과 트라우마에 대하여


"요새 저는 삶이 공허하다고 느껴요."



의붓 오빠가 죽은 뒤로, 저는 계속 그 시점에 혼자만 멈춰 서서 사는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실 때도, 마시지 않을 때도 불현듯 찾아오는 오빠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명확한 사인이 있는데도 말이죠. 오늘도 어김없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오빠의 죽음으로 저한테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겼고, 열심히 살아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 때문에 삶이 허무하다고 답했습니다. 오늘은 제 삶과 새로운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오빠가 죽은 뒤로, 저는 계속 의문을 품고 살아갑니다. 못 돼 처먹은 사람들은 죽지 않고, 왜 내 형제를 데려가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세상엔 부조리함이 넘쳐나고 불공평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요새 눈빛이 공허합니다. 제 삶도 공허하고, 제 오빠에 대한 죽음도 공허해서 제 눈에 담긴 공허함을 감출 힘이 없습니다.


종교에 답을 구해도 그건 모두 제가 믿는 신의 섭리일 뿐, 누가 먼저 죽는지는 인간이 알 수 없다고 하지요. 왜 제 인생은 이렇게 남들보다 고난의 깊이가 깊어야만 하는 걸까요? 왜 항상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제가 믿는 신이 너무 미워서 한 달 동안 성당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난주 주일에 아버지의 집 근처에 있는 성당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믿는 신께서는 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가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저는 끝까지 납득할 수가 없네요.


출처: 매일미사 앱





술이 문제인 걸 알고 있습니다. 오빠가 죽은 뒤로,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술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요. 그렇다고 술을 매일 마시진 않았습니다만, 한 달에 한 번만 먹던 술자리를 그날 이후로 2~3번씩 일부러 갖고 마셔댔으니까요.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기분이 좋죠. 억지로 제 도파민을 자극시키니까요. 그러다 임계치가 넘어가면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작년 공황장애가 심했을 때도 이 기분이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차원이라고 느낄 정도로 깊습니다.


절망감이라고 하죠. 네, 저는 지금 절망하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삶이 허무하다고 말씀드렸고, 술이 문제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조용히 들으시더니 이번엔 술이 덜 생각나도록 약의 용량을 늘려보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지난주에 검사했던 검사지를 훑어보시더니, "공황장애가 다시 심해진 것 같아요."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지금 좀 심각한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가 어떨 때 나오는 것 같나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저는 이전에 말씀드렸던 트라우마는 모두 해결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하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한테 새로운 트라우마가 왔어요. 어떨 때 발동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오빠가 죽은 뒤로 시도 때도 없이 삶이 허무해요. 제 정신이 건강했다면 오빠의 죽음을 좋은 쪽으로 발동하게 만들어서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안 돼요. 열심히 살아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의 목숨이 참 허무하네요."


언젠가 아버지가 일을 나가시고, 저와 엄마는 평화롭게 아버지의 집에서 도란도란 대화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엄마, 난 오빠가 죽고 난 뒤로 좀 허무해. 엄마도 그래?"라고 물어보니 엄마는 "그래? 나는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넌 그렇구나."라고 했던 때를요. 오히려 제 부모님은 괜찮은 척 애를 쓰시고 계신 듯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형제 잃은 누이보다 자식을 잃은 부모 심정이 더 비통하겠지요.




아무리 이유를 찾으려 해도 도통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지나야 찾을 수 있겠죠. 그럼에도 제가 살기 위해 한 번 더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제 한문 이름과 세례명 때문일까요. 제 한문 이름은 '어루어만질 미, 위로할 래'입니다. 세례명은 '페트라'이고, 뜻은 '반석'입니다. 사람들을 어루어만지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겪고 반석을 다져야만 하는 걸까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 이름 탓이라고 치부하기엔, 생전 처음 겪어보는 깊은 절망감과 애통함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닙니다. 모든 생물체는 반드시 죽어야 하니까요. 태어나는 동시에 죽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죽어가는 그 과정에서 어떤 생물체만 유난히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작가가 생각납니다. 이 분은 살아생전 허무주의를 토대로 작품을 써내려 갔죠. 허무주의는 사전적인 의미로 이렇습니다.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인식되지도 아니하며 또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태도. 동양의 불교나 노장 철학과 서양의 소피스트에서도 보이며, 니체가 이를 현대적 의미로 심화하였다. 그는 인간이 만든 신(神)을 인간 이상으로 신봉하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여 삶의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하면서 기성 질서와 기성 가치 체계의 붕괴를 역설하였다.'


 삶에 적용해 보니 저는 지금 허무주의 끝을 달리고 있는  같습니다.  어떠한 것도  삶이 구원받을  없음을, 끝내 허무하게 끝나버릴 파리 같은  목숨이 허무하네요. 그럼에도 바라는   죽음은 이렇게 돼도 상관없으나,  가족의 죽음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불쑥 찾아오는 새로운 트라우마로 인해 공허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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