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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나 Apr 03. 2020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음란 동영상’을 보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진술녹화실 말고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 기척에 신경 쓰지 않고 동영상에만 집중하려면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곳이어야 했으니까요. 사무실 한구석에 마련된 진술녹화실이라면 웬만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 방음이 잘 되었고, 책상도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을 마주 보고 놓여 있어서 누가 들어온다면 단번에 알 수 있었거든요. 시시티브이가 세 대나 설치되어 있다지만 수사관용 모니터는 녹화 범위에 들어가지 않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둑한 진술녹화실에 들어서니 고민이 되더군요. ‘불을 켤까, 말까? 켜, 말아? 켜... 지 말자.’ 출입문 유리에서 새어드는 빛에 의지해 모니터 앞에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컴퓨터 본체를 더듬어 시디롬을 찾았습니다. 시디를 밀어 넣고서 모터 도는 소리가 멈출 때까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으로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같은 팀의 홍 형사가 이어폰을 빌려주며 한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민망해하거나 불쾌해하면 안 돼. 잘 보고 판단해. 니가 피해자를 대신하는 거니까.”


시디와 함께 접수된 고소장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고소인, 그러니까 피해자는 이십대의 여성이고,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네가 나오는 음란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달받은 링크에 접속하자 자신과 남자친구가 성관계하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혼자만 보겠다기에 촬영을 허락한 영상이 어째서 유포되었는지 남자친구를 추궁했더니, 영상을 찍었던 휴대전화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는데 거기서 유출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피해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불법 사이트에서 “○○녀”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매일 밤새워 인터넷에서 자신이 등장하는 영상을 찾아 캡처하고, 게시자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사이트에 삭제 요청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극도의 우울과 불안과 분노와... 자살 충동을 느끼면서요. 그리고 법률 사무소를 통해 고소장을 작성하고 경찰서에 접수했습니다. 제가 배당받은 사건도 피해자가 그런 과정을 통해 찾아낸 동영상의 게시자 중 한 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2012년 10월 무렵의 일이었다는 걸 밝혀두어야겠네요. 사건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성폭력처벌법) 위반’으로 접수하지 못했던 까닭을 설명하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동영상이 애당초 피해자의 동의를 받아 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정되기 전의 성폭력처벌법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의사에 반하여 촬영하거나, 의사에 반하여 촬영된 촬영물을 반포 등’ 한 사람만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친구가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한 행위가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게 아니라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제삼자의 유포 행위도 처벌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거지요..

* 구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14조의 2 제1항 / 대법원 2010도6668


다만 그때에도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약칭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음란한 영상(불법정보)’를 유통한 사람을 처벌하는 일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영상이 촬영되는 동안 이루어진 피해자와 남자친구의 대화 중에 피해자의 신원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명예훼손죄를 적용하기도 충분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대화를 들으면 피해자가 “○○라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거든요. 그걸 확인해야 했기에 홍 형사가 저에게 이어폰을 빌려주었던 겁니다.


따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피의자는 제가 적용한 두 개의 죄명으로 처벌받았을 게 틀림없습니다. 고소장 맨 뒤에, 같은 동영상을 유포한 다른 다섯 사람에 대한 사건의 처분결과통지서 사본이 붙었었거든요. 제 사건의 피의자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얼마 안 되는 벌금형을 받고 말았을 테지요. 고작 벌금, 많아봐야 몇백만 원에 불과한 벌금. 여섯 명에게 부과한 벌금을 모두 합하고 그들이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으며 겪었을 불편함을 다 더한대도, 피해자가 감내해야 했을 비용과 불편함과 괴로움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피해자가 고소 이후 절차를 법률사무소에 위임한 일이 그 와중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사법절차를 겪어낼 일에 엄두가 안 났을 수도, 허락받아 촬영한 동영상을 유포한 행위를 성폭력처벌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만 포기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동영상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타인의 신체를 촬영한 촬영물’(성폭력처벌법)이라든가 ‘음란한 영상’(정보통신망법)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굳이 알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나중에, 2018년 12월부터 시행된 개정 성폭력처벌법에 의해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촬영한 촬영물을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유포하는 경우’ 그리고 ‘촬영 당시에는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아도 사후에 그 의사에 반하여 유포하는 경우’를 처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수사관들은 정보통신망법과 형법상 명예훼손이라는 잔꼼수를 쓰지 않고도 ‘리벤지 포르노(헤어진 연인에게 보복하기 위해 유포하는 성적인 사진이나 영상 콘텐츠)’에 딱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법 조항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정보통신망법에 명시되어 있는 “음란한 영상”이란 표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음란한 영상”. 음란, 한, 영상. ‘음란’ - “음탕하고 난잡한”(출처:표준국어대사전), 영상. 누군가에게는 한없는 고통을 주지만, 세간의 잣대로는 음탕하고 난잡한 영상. 그리고 성폭력처벌법에서 이야기하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 촬영물”에서도, ‘성적 욕망’이 유발되는 사람은 그 촬영물을 시청하는 사람이겠고, ‘수치심’이 유발되는 사람은 촬영물의 존재로 고통받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주체가 다른 ‘성적 욕망’과 ‘성적 수치심’을 “또는”이란 접속어로 묶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n번방 사건”으로 통칭되는 텔레그램 비밀방에서 자행되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엄정 대응과 재발방지책 마련을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있었습니다. 국회 청원사이트에서 십만 명의 동의를 받아 “제1호 국민동의청원”으로 채택되었습니다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은 이 청원의 취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그도 그럴 것이, 텔레그램도 ‘n번방’도 모르는 사람들이 37분짜리 사명감을 가지고 무슨 이야길 얼마나 심도 있게 했겠나요.


비단 법을 만드는 사람의 문제이기만 했겠습니까. 법을 적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여자 연예인을 자살에 이르게 한 동영상 사건을 아시겠지요. 판사는, 전 남자친구가 협박의 빌미로 삼았지만 유포하지는 않았던 성관계 동영상을 직접 보아야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죄의 유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며 증거 제출을 요구했습니다. 증거를 법정에서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고 동영상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감안한다면, 판사는 2차 가해와 인격 살인의 개념을 모르는 등신 머저리 천치가 아닌가요? 판사님, “정황”을 가지고 무죄 판단을 할 거였다면 당신은 증거 제출 요구를 할 때 신중하셨어야 합니다.

※ “피해자가 촬영된 사진을 보고도 성관계 동영상과 함께 삭제하지 않았고 피해자 또한 피의자의 사진을 촬영했던 당시 정황 등을 볼 때 명시적으로 촬영에 동의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찍은 것으로 보이지 않아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 (2019. 8.29. 피고인 최종범, 성폭력처벌법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무죄, 판사 오덕식)


경찰은 특별하고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왜 지금에서야,라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해집니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으니 기다려주세요, 같은 하나 마나 한 소릴 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으려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겠지요. 지켜봐 주세요. 질책하세요. 경찰의 무지하고 무정한 점을 짚어주세요. 사건을 계속 지켜봐 주세요. 수사가 끝나면 재판에서, 그리고 다시 입법 논의 과정에서 목소리를 내 주세요. ‘법의 도움을 받으리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무력한 중생을 굽어보며 지은 법’을 그냥 두지 마세요.


디지털 성범죄는 특정 성별이 다른 성별에게 가하는 폭력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 수사팀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사람의 성별을 구태여 밝힐 필요도 없을 겁니다. 피의자나 피의자가 같은 성별을 가진 모든 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테지요.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예요. 성별 갈등 같은 낮은 차원의 문제로 격하되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이제 적어도 270만 명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청와대 국민청원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 2020.4.3. 기준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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