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만에 선배에게 연락했다
떠돌이 멍멍이 같은 나
길을 잃었다.
삶이 그렇듯 마음도 한번 지어지면 사그라지기 전까지 제 자리를 찾아 떠도는 것이겠지. 내 마음은 트레이너 선생님에게서 A로 흘러갔으나 끝내 둑에 막혔다. 길 잃은 마음은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없어 지지도 않았다.
그 마음은 떠돌이 개와 같아서 누군가 관심만 주면 달려가 품에 뛰어들어 길 위의 생활이 얼마나 처량했는지 낑낑거리며 하소연했을 것이다. 물론 품에 뛰어드는 건 이제 섣불리 못하겠다 싶어 전혀 뛰어들고 싶지 않은 품을 찾던 중 그 선배가 생각났다.
그는 같은 학교이지만 과는 달랐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났다.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처음 해 보는 아르바이트라 설렘도 걱정도 많았는데 다행히 FM으로 참고할 수 있는 훌륭한 견본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선배였다. 갓 전역 후 복학한 상태, 말 안 해도 칼각. 당시 선배에게 배운 것들 중 아직도 써먹는 게 있다. 박스 테이프를 쉽게 제거하는 방법과 쓰레기를 발로 밟아 최대한 부피를 줄이는 것. 사소하지만 유용한 팁들이다.
선배는 나를 친 여동생처럼 대해줬다. 많이 알려주고 푸념도 들어주고 바쁠 땐 같이 일해주고, 컴퓨터를 봐주기도 하고 같은 기숙사에 있었던 겨울엔 귤을 한 봉지 사다 내밀기도 하고. 놀랍게도 이 모든 게 썸이 아니었다. 나도 그도. 그저 사심 없이 대했지만 많이 의지가 되긴 했다. 사회에 나가서도 가끔씩 한번 얼굴 잊어버리겠다 싶을 때 만나곤 했다. 그러다 결혼하고선 연락이 끊겼다.
선배에게 결혼한단 말을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톡으로 했다. 꼭 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런데 선배는 정말 빈말로도 가겠다는 말이나 혹은 축하의 느낌이 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퉁명스레 느껴졌으며 결혼할 사람에 대한 신상만 약간 물어봤던 것 같다. 그 후로 딱히 연락을 하지 않다가 몇 년 후 오래간만에 선배에게서 톡이 온 적 있다.
"응 마침 결혼하고 산다고 했던 곳을 지나는 길이라. 만날까 하고."
당시엔 전남편의 고향에서 살던 시기였고 작고 말도 많은 동네였기에 남편 외의 남자를 따로 만난다는 게 부담스러워 안 되겠다고 했다.
속으론 좀 꽁한 것도 있었나 보다.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가 어느 날 난데없이 선배에게 연락을 한 상황이라 잘 받아줄지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반갑게 맞아주는 터라. '남자들은 대체 왜 그래요'로 시작해서 당시 A에게 까이고서 갈 곳 없는 외로운 맘을 너무 실타래 마냥 술술 풀어놨나 보다.
결국 그날 밤 선배가 날 보러 당장 오겠다고 한걸 보면... 내가 걱정돼서라나. 늦어서 위험하다 말렸지만 한사코 온다고 했다.
"내가 걱정돼서라면 올 필요 없어요. 선배가 오고 싶어서라면 더 이상 말리지 않을게요."
내가 걱정된다고 보러 온다는 말은 뭔가 기분 나빴다. 핑계 같아서. 걱정이 정말인 것도 싫다. 동정받는 기분이라서.
그래서 이렇게 말했고, 결국 선배는 자기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이라 시인했지만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충남 아랫지방에서 서울까지. 새벽 4시, 몇 년 만에 보는 선배가 아무도 없는 인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