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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은도 Feb 12. 2023

선배의 사정

그게 무엇이든


선배와는 그렇게 끝이 난 것 같았다. 그런데 연휴가 끝나고 서울에 올라갈 때쯤 되니,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어디야? 서울 도착했어?"

이 말이 왜 반갑지 않았을까. 선배가 날 만나고 싶어 한다 느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고,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의 나라면 말없이 뭉개고 며칠씩이나 대답하지 않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만, 그도 나의 반만큼만 이라도 답답하고 애타는 기분을 느껴봤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한 삼일이 지나자 선배와 이야기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여보세요."


"어. 여보세요?"


조심스러운 말투. 내가 화라도 낼 거라 생각한 걸까.


"선배, 나 정말 많이 걱정했었어요. 무슨 사고라도 난 걸까, 혹시 쓰러지기라도 한 건가 궁금하고. 대체 왜 대답 없었던 거예요?"


"아니.. 그냥 집에서 계속 누워있었어. 꼼짝도 하기 싫더라고. 내가 그러니까 가족들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전혀 이해가 가는 설명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도 나오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닦달해 봐야 이 정도가 다일 것이다.

그냥 내가 예측해 보기에는 선배가 당시 회사일로 힘들기도 했고, 전에 가족들과 연락을 많이 안 했을 때 사이가 좀 멀어지는 등의 요인이 명절에 겹쳐서 회피하고 잠수를 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런 거라면 이해한다.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그저 혼자만의 세계로 가라앉고 싶어지는 때가 없는 게 아니니.

하지만 애타는 내 연락에 그저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아 나중에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만 했어도 그렇게 발을 동동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선배, 선배가 잘 있는지 한마디만 대답해 줬어도 됐을 거예요. 난 연락을 그렇게 오랫동안 받지 않으면서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 사람과는 사귈 수 없어요. 그건 날 존중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럼 나랑 헤어지겠다는 거야?"


"네. 다시 좋은 선후배 관계로 돌아갔으면 해요."


"..... 그래.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마지막으로 그동안 나랑 사귀면서 내가 고쳤으면 하는 부분 있었어요?"


이걸 물은 건 이대로 헤어지면 너무 아무런 배울 점도 없이 끝나는 것 같아 뭐라도 이 관계에서 건져가고 싶어 한 물음이었다.


"음... 그냥 다른 건 없고, 너무 걱정이 많은 거?"


"음... 그래요. 잘 지내요."


그렇게 끝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깔끔히 끝난 것 같아 마음이 상쾌하기까지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선배를 빠르게 잊었다. 소개팅 앱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론 선배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진 않은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느껴졌다. 그런데 일주일 뒤 선배에게 다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뭐 해?"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잘 지내?"


이렇게 수시로 연락이 왔고 나는 선후배 사이에서 오고 갈 만한 안부인사 정도로 대화를 짧게 끊어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뭐 해? 보고 싶어..."


이렇게 문자가 와서 순간 확 울화가 치밀었다.


"난 보고 싶지 않아요. 선배한테 남은 감정 없어요."


"뭐? 나한테 감정이 없어?"


"네."


"알았어. 그럼 이제 연락 안 할게."


그게 진짜 끝이었다. 선배는 정말 그 이후로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그립지 않았다. 먼저 잠수 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보고 싶다고 하는 건지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나랑 자고 싶어 연락하는 건가 라는 생각만 들뿐.


흔히 사랑에 눈이 먼다고들 표현한다. 하지만 사랑까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눈이 멀 수 있다. 대학시절, FM대로 성실했던 선배의 모습에 그가 여전히 그대 로고, 연애에 있어서도 성실할 거라 넘겨짚었던 나의 고정관념,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함, 이건 아주 잘못된, 매우 단단히 잘못된 버전의 [오만과 편견이다].


선배와 있던 일을 되짚어 글을 썼던 시간들이 고통스러웠다. 글 쓰기가 어째서 이리도 힘든 건지, 무엇이 자판 위로 올라가는 내 손을 끌어내린 건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짐작하건대, 배신감. 믿었던 사람에게 느껴진 배반의 감정과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자책감, 속았다는 모멸과 자괴감. 이 모든 것이 이 연애의 본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별개로 내 감정은 그런 것들을 느끼는 듯했다.


선배시리즈를 쓰며 선배에게 처음으로 다시 연락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아직까지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덜어내고 싶음이었다. 대체 '왜'그랬냐고. 왜 그렇게 숨어들었었냐고. 달리기를 좋아하는 날 위해 달리기 전용 양말을 사주는 다정한 사람과 며칠씩 잠수를 타는 사람 중에 어떤 게 진짜 선배의 모습이냐고.


하지만 통화버튼을 누르는 손을 겨우겨우 옆으로 옮겨 연락처 삭제버튼을 눌렀다. 이례적인 일이다. 헤어져도 딱히 연락처를 지우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엔 그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엔 지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난 더 이상 울먹이며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왜 날 좋아하지 않는 거냐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되니까. 어떤 식으로든 발전했다면 더 이상 추해지지말자는 일말의 이성이었다. 그 발전이 비록 연락처를 지워버리는 물리적 처에 머물렀다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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