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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Sep 14. 2021

08. 보슬비

어린 날의 추억

 사람에게도, 정원의 식물들에게도 가장 혹독한 계절은 겨울이 아닌 여름인듯 하다. 떼로 몰려다니는 모기들과, 뜨거운 태양에 꽃까지 녹아 내린다. 다행히 단독 주택으로 이사온 뒤, 옥상 테라스와 정원에서 커다란 수영장을 한달 내내 가동할 수 있고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계곡이 있어 감사하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쌀쌀하다. 가을을 알리는 비가 일주일 째 계속 되자, 밖에 나가 뛰놀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이런 날에는 집 안에서 아이들이 농구공을 튀기거나 축구를 하거나, 탱탱볼로 배구를 한다. 층간 소음의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고 아이들의 숨쉴 구멍은 많아졌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나의 두통은 늘어났다. 이것이 함정인 것을 전에는 몰랐다.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 아이들 둘은 층간 소음 걱정으로 인한 나의 통제가 사라지자, 집 안에서 살판이 났다. 아파트에 살 때는 그리 부산한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원인은 나의 통제가 사라진 것에 있었나보다. 그러다보니, 쉬자고 가는 호캉스를 가서도 이 습관이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주의를 주게된다. 


 안 되겠다 싶어 옷을 챙겨 입히고 우산을 하나씩 들고 가장 만만한 동네 도서관으로 향한다. 아이들은 시원한 비가 발 가에 와 닿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처음엔 조금씩 발만 적시는가 싶더니, 시간이 갈 수록 아이들의 행동은 과감해진다. 이제는 아에 물 웅덩이에 발을 담근다. 조금 더 가서는 멀리서 부터 도움닫기를 해서 달려가 물 웅덩이에 두 발을 풍덩! 담근다. 


'촤아악~~!!'


예상치 못했던 물 세례에 깜짝 놀란 아이들은 잠시 놀라 머뭇거리다가, 어느새 깔깔깔! 웃어댄다. 그리고 이제는 우산도 벗어던지고 달려간다. 감기가 드는 건 아닐지, 잠시 걱정하다가 나의 어린 시절의 한장면이 떠올랐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학교에서 집에 오려면 마을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한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버스 안은 언제나 하교하는 학생들로 떠들석 했고, 참을성 없는 마을 버스 아저씨는 제발 조용히 좀 하라며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주춤할 뿐, 학생들은 적막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떠들어댔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운동화 대신 비에 젖을까 학교에서 신는 삼색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양말은 벗은채 버스를 타고 하교한 우리에게 우산은 거추장한 장식품일 뿐이었나보다. 가위바위보를 해 진 사람은 나무 밑에 가서 서 있었고, 이긴 사람들은 나무를 흔들어 물을 떨어 뜨렸다. 그리고 흠뻑 젖은 친구의 모습을 보며 이긴 친구들은 깔깔대고 웃어댔다. 그게 뭐라고 가위바위보를 할 때 술래가 될까바, 나는 그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댔다. 그리고는 함께 걸어오는 내내 웅덩이에 모인 물을 기술적으로 앞 사람 다리에 정확하게 차대며, 여자 친구, 남자 친구 할 거 없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온 몸이 쫄딱 젖어서는 집에 도착했다. 


 최근 어느 블로그에선가 읽은 글이 생각난다. 우울은 수용성이라고.  그래서 물에 쉽게 지워진다고...... 이 말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일까? 요즘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운동은 '수영'이다. 차가운 물에 머리까지 온통 적시고 숨가쁘게 운동하고 나면 온갖 잡념과 걱정이 씻은듯 사라지는 것 같 다. 늘 모범생이었던 나와 나의 친구들은 부모님의 잔소리를 거의 듣고 자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달픔이 없었을까? 그 무언의 압력과 주변의 기대와 외로움은 항상 우리 자신들의 몫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치열하고 숨가빴던 고3 그 시절 입시에 지쳐있던 우리들의 무거운 마음들을 그렇게 그 보슬비들에 애써 씻어 왔기 때문에, 그 짧고도 긴 시간들을 우리가 무사히 견딜 수 있었나 보다.  


 어려서부터 물을 좋아하는 나를 닮아서 인지 나의 아이들도 물에서 노는 것을 참 좋아한다. 욕조에 물 받고  목욕하기, 수영하기, 파도 맞기, 비에 젖는 것 까지, 이렇게 물에 빠지고 젖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어느 새 비에 흠뻑 젖은채, 집에 들어온 아이들을 위해 나는 커다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는다. 앞으로 나의 아이들이 겪어 내야 할, 수 많은 일들과 걱정과 근심들이 나에게 그래왔듯이 부디 때때로 물에 녹아 씻겨져 버리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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