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지역, 백령도와 대청도
대청도 농여해변
짙은 안개 속 거센 풍랑 한가운데서 등대를 떠올린다. 방향도 알 수 없고 그대로 가라앉을 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서 상상하는 등대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빨간색 또는 하얀 색 등대. 미끈하게 뻗었거나 탑을 쌓듯 멋스러운 등대. 대수롭지 않게 스치듯 대했던 등대가 간절하게 다가온다. 닿고자 하는 섬의 등대는 두터운 안개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있을지.
전광판을 수시로 쳐다봤다. 출항 예정시각이 표시될 자리에는 ‘안개 대기’라는 글자가 바뀌지 않고 있었다. 새벽에 서둘러서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지만 세 시간을 기다려도 출항은 불투명했다. 섬은 쉽게 물길을 내주지 않았다. 백령도를 가기위해 몇 년 전에 네 시간을 기다리다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다. 생업이 달려서 꼭 가야할 곳은 아니었다. 가보고 싶은 바람으로 길을 나섰고 가야할 곳이 되었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처럼 생겼다는 섬. 안개에 쌓인 그 섬에 도착할 수 있을지. 또 포기해야하나 하는 순간에 사람들이 움직였다. 물길이 열렸다는 통보에 사람들은 성지에 입장허가를 받은 듯 환한 표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박하기까지 순탄하지 않았다. 물은 요동쳤다. 거대한 철선은 파도더미에 맥을 못추고 비틀거렸다. 선창(船窓)밖으로 바닷물이 부딪히며 수면이 올라오고 수평이 무너졌다. 일상이, 당연하게 반복해서 살던 세상이 흔들렸다. 쉽게 생각하고 타성에 젖던 습관이 균형을 잃었다. 힘들었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평화였다.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밋밋하고 짜증나던 일상도 감사였다. 몸이 불규칙하게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뒤늦게 먹었던 멀미약도 소용이 없었다. 어딘가에 숨어있던 핑계와 원망이 섞이고 뒤틀려서 분출되듯 배 멀미를 했다.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전, 울릉도에 갔었다. 가도 가도 물이었다. 육지가 과연 있었나 싶었고 땅을 밟을 수가 있을지 아득했다. 멀미로 바닥에 누워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섬에 내려서 성인봉에 올랐을 때는 그 과정을 잊고 아름다움에 빠졌다. 터득한 게 있다면 고통의 시간도 지나면 잊혀 진다는 거였다. 백령도에서도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배안에서 상황이 하나의 절차로 남기를 바랐다. 울릉도 가는 배에서 등대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젊었을 때였다. 세상일을 겪고 백령도를 향하면서는 무섭게 출렁이는 파도건너편 안개 속에 서있을 등대를 떠올렸다. 섬으로 불러들이기를 망설이다가 입도를 허락한 등대는 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묵묵히 서있는 나무처럼,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탑처럼 섬의 입구에서 버티며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빛으로든, 파동이든, 소리로든 등대와 소통을 해서 그 섬에 닿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특별한 방향성은 없었다. 경쟁에 뒤처지지 않게 주어진 현실에 급급했다. 무엇을 이루고 어디에 닿기 위해 장기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점수 따라 전공을 정했고 생계를 위해서 취업을 했다. 사회라는 바다로 나간 작은 배는 물살에 흔들렸다. 위태롭게 항해하던 배는 자잘한 파도와 부딪히기도 하다 큰 너울과 충돌해서 맥을 못 추기도 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사정없이 흔들릴 때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몸을 사리고 움츠렸다. 안으로 안으로만 위축되다가 침몰할 것 같았다. 대인관계에서 방어벽을 쳤다. 등대가 필요했지만 그 존재를 믿지 못하고 난파선처럼 흔들렸다. 가라앉지 않을 정도의 파도로 인해서 방향을 생각하고 등대를 믿으며 나아갔다. 바람이 심하고 안개가 짙은 날에 배가 섬에 닿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등대가 안내하는 대로 방향을 정해서 차근차근 다가가야 한다. 시간의 파도에 올라타서 때로는 흔들리는 배가 되고 한편 기다리는 등대가 되기도 했다. 등대처럼 다가오는 이가 있어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만나지 못 한다. 작으나마 등대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퇴직을 하고 발달장애인 평생교육센터에서 지원활동을 한 적이 있다. 20대와 30대 학생들은 자폐나 다운증후군, 집적 등의 장애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작은 배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흔들리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나아가야했다. 말이나 글로 소통이 가능한 학생들이 있고 소통이 어려운 학생들도 있었다. 말을 못하는 학생들은 손짓을 하거나 부정확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감정변화에 대한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인간관계에서 말이 없다면 차라리 속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말이 없다면 서로가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표현이 어려우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자기 식으로 짐작을 하고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그 학생들에게 작은 등대가 되고 싶어 다가가려해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도 했다. 무표정의 뒤에는 두려움이 있는지도 몰랐다. 다가감이 진심인지 판단을 하는 것 같았다. 곧 떠날 사람인지 오래 지켜줄 사람인지 느낌으로 아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비가 쏟아 붓던 날이었다. 날씨가 안 좋은 날은 공기 중에 불안의 요소가 깔려 있었다. 교사가 수납 정리에 관한 수업을 진행했다. 한 남학생이 선생님을 쳐다보지도 않고 화면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통을 하려하지 않았다. 그 학생은 교실 안에서 고립된 작은 섬 같았다. 잠시 후 학생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앙다물며 손목의 시계를 잡아당기며 빼려고 했다. 선생님이 다가가 도와줄까 말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학생은 핸드폰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30대 청년이 어린 아이처럼 아빠를 찾으며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하소연을 했다. 자신만의 신호로 울며 자신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누구와의 소통도 거부하고 아버지라는 등대에 신호를 보냈다. 그 남학생이 소리를 지르자 한 여학생이 무섭다며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몸이 안 좋은데 무섬증이 왔다며 엄마에게 가겠다고 엘리베이터를 타려했다. 그 여학생은 엄마에게 의지를 했다. 엄마나 아빠를 찾는 학생도 있지만 부모가 없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여학생은 멀뚱하게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혼자 소리를 지르며 왔다 갔다 했다. 흔들리는 배안에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듯이 학생들은 방향을 잃고 등대의 존재를 찾기도 했고 혼자 나뒹굴기도 했다. 다가가서 함께 하기 위해서는 오래 기다려주는 정성이 필요했다.
엄청 큰 파도로 인해 백령도로 가는 배의 흔들림이 멈추지 않았다. 속이 뒤틀린 사람들은 바닥으로 기다시피 걸어 뒤편으로 이동했다. 직원들이 검은 비닐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과욕을 비워내고 자만을 게워내었다. 4시간 걸려 도착한 백령도에서 수평의 땅을 밟았다. 용기포항의 서방파제에는 흰색과 붉은 색의 두 개의 등대가 있었다. 심플하고 미끈하게 뻗어있는 세련된 모습이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많이 상상하고 만나고 싶었던 등대였다. 서방파제 등대는 10여년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설치된 구 등대는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새로운 등대에게 자신의 역할을 내주고 오래된 탑처럼 서있는 구등대의 모습은 처연했다. 계단을 차근차근 올라 입구에 다다르는 구조의 등대는 오래된 탑을 연상시켰다. 회색빛 콘크리트 구조물에는 세월의 더께가 쌓여 낡았지만 초라하기보다는 엄숙한 모습이었다. 유인등대였을 그곳에서 누군가 등롱의 등명기에 불을 밝히고 망망 대해흫 보며 어선의 무사귀환을 바랬을 것이다. 그 때는 전기가 아니라 가스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등대 불빛은 흰색, 주황색, 녹색.. 어느 빛이었을지. 빛의 세기는 어느 정도이고 몇 초에 몇 번을 깜박였을지. 안개 속에서 암초를 피하려 침로를 변침하려는 배에게 묵직한 무적소리를 울렸을 수도 있다. 금이 간 콘크리트 벽에 출입문조차 떨어진 낡은 등대를 보고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등대가 되려했고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다른 곳으로 가려했다. 다른 섬을 꿈꾸었고 신호를 외면하려 했다. 필요할 때는 불빛을 따라 정박을 하고 쉬어갔다. 기운을 회복하면 등대에서 멀어져 갔다. 등대가 낡아가며 외로워하며 말을 걸어올 때는 멀리서 바라보고 잘 다가서지 않았다. 혼자 바다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등대도 배도 낡아간다. 등대가 그리워 찾아가도 제 기능을 잃은 등대는 옛 기억을 더듬게 한다. 등대도 때로 외롭고 힘들다는 것을 모르고 외면하고 살았다. 지나간 모든 것에 고마웠다고 혼잣말을 해본다.
사곶 해안은 파도가 거셌다. 운무가 낮게 드리워 있고 모래가 춤을 추었다. 그 정도의 성난 파도도 오는 과정을 떠올리면 기꺼웠다. 두무진에서 지는 노을도 경이로웠다. 새털구름이 깔린 바다 위 유람선에서 안개에 휘감긴 신비한 기암괴석들을 둘러보며 물범이 헤엄치는 것도 봤다. 두무진, 콩돌 해변, 해당화, 사자바위. 기대했던 풍경들을 만났다. 천안 함 46용사 위령탑 앞은 숙연했다. 토박이로 살며 물질을 했던 식당아줌마는 성게와 가리비를 내놓으며 오래 전 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쁜 기억은 바다에 던져버리라는 기사아저씨의 말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백령도에서 배로 20분 거리인 대청도에 다다랐을 때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맞이해 주었다. 선진포항 방파제 등대는 무인등대이며 2009년에 등불을 밝혔다. 대청도는 청정하고 걷기 좋았다. 광난두 정자각 아래 언덕에서 ‘해병 할머니 여기 잠들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을 보았다. 대청도에 주둔한 해병대원 들에게 사랑을 베푼 한 할머니의 묘비였다. 황해도에서 월남한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대청도로 시집와서 어렵게 살았다. 1951년에 해병대가 대청도에 주둔했다. 할머니는 한 해병의 군복을 수선해 준 일로 해병대와 인연을 맺었다. 그 이후 해병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주고 찢어진 군복을 수선해 주었다. 할머니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간식을 사러 온 군인들에게는 돈도 받지 않았고 손주처럼 대했다. 해병대원 들은 할머니의 정성에 고마워하며 따르고 집에 페인트 칠도 해주었다. 할머니는 방안의 벽면 가득 해병들과 찍은 사진을 붙여놓고 바라보며 대청도를 떠나지 않았다. 2012년, 87세로 작고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해병대원들에게 무한 사랑을 베푼 할머니는 장병들에게 등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자연이 채색한 환상의 섬. 대청도는 버스에 큰 글자로 적혀있는 표현처럼 그런 섬이었다. ‘서풍받이 가는 길’을 걸으며 녹색의 산과 옥빛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만났다. 산과 바다를 이어주는 접경마다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이 눈길을 끌었다. 걸으며 풀숲과 바위틈에서 만난 노랑, 분홍, 보라 꽃들의 색도 유난히 선명했다.
농여해변은 썰물로 드러난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아른아른한 무언가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갔다. 가볍게 움직이며 피어오르는 해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바위들에 이끌리듯 다가갔다. 주변에 갈매기 몇 마리가 모래펄에서 한가롭게 오갔다. 먼 바다위로 오전의 햇빛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뒤돌아보니 코발트 빛 넓은 하늘에 흰 구름이 자유로운 붓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산과 바다와 모래밭이 어우러진 풍경 안에서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뱃길은 순탄했다. 안개도 풍랑도 없는 잔잔한 바다를 건너오며 배 멀미는 없었다. 같은 뱃길인데 상황에 따라 달랐다. 가는 동안 격랑과 안개가 없다면 무난했겠지만 배가 가라앉지 않을 정도의 위험을 겪으며 등대의 고마움을 깨달았다.
백령도 유람선에서 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