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화 Aug 20. 2022

은행나무 아래를 걷고 싶을 때 가는 곳

친숙하게 다가오는 덕수궁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해마다 시월 말 쯤 되면 많이 듣게 되는 ‘잊혀진 계절’의 가사다.   

   

  10월 말에서 11월 중순에는 가을의 정취를 부지런히 찾아다니게 된다.  

    

  2021년 하반기에 세종문화회관 아카데미에서 여행 드로잉을 배웠다. 가을에는 다음해에 있을 전시회에 대비해서 서울의 풍경을 그리러 다녔다. 지도 선생님의 인솔하에 노들섬, 성북동, 인왕산, 명륜당 등을 갔다. 명륜당에서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를 그렸다. 노란 은행나무의 명암을 조금씩 달리하며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일행과 헤어져 오면서 서울에서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해봤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덕수궁이었다. 은행잎이 더 지기 전에 찾아가서 그림그릴 사진을 찍어야겠다 싶었다. 

     

  흐린 날의 오후였지만 가을을 느끼기 위해 덕수궁을 찾은 사람들은 많았다. 11월 중순, 덕수궁은 낙엽이 지고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도 있었지만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한창이었다. 친구로 보이는 아가씨 두 명이  은행나무 아래를 걸어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중년의 아줌마들이 핸드폰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포즈를 취했다. 데이트하는 남녀 들, 가족들, 친구들과 온 청년들... 늦가을의 덕수궁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덕수궁 안에는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덕흥전, 정관헌, 석조전 등이 있다. 석조전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잠시 쉬다보니 유럽의 궁전 앞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분수와 정원도 잘 조성되어 있어 건물과 조화를 이루었다. 공간은 세월 따라 변해간다. 동관은 영친왕의 생활공간이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고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을 거쳐 대한제국 역사관이 되었다. 서관은 덕수궁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에 ‘이중섭 전’을 인상 깊게 본 기억이 났다. 정관헌(靜觀軒)은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독특했다. 내부에는 인조석 기둥들, 외부에는 화려한 목재 기둥들이 있다. 세 방향으로 전통 문양을 가미한 서양식 테라스가 있다. 고종은 이 건물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열었다. 덕수궁은 교통이 좋아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여러 번 갔어도 건물들을 잘 살펴본 것 같지 않다. 시간을 내어 찬찬히 둘러보고 싶다.   

   

  덕수궁을 나와 돌담길을 걸었다. 낙엽이 쌓여가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벤치에 앉아서 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전부터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은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이별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찜찜해서 되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과거에 돌담길을 지나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있었다. 이혼을 하러가는 남녀가 돌담길을 걸어 가정법원으로 갔기 때문에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이별과 연관된 말은 개의치 않아도 되겠다. 



작가의 이전글 일주일이 짧은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