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통해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길고 지루하게 배웠다면, 뭐든 ‘그냥 하면 된다’는 걸 실질적으로 배운 건 번역을 통해서였다.
나는 번역을 딱히 잘 하지도 못 했고, 음악과 마찬가지로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정도였다. 심지어 음악에 하도 데여서 한동안 뭘 좋아해도 될지 자신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열렬히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음악은 꾸준히 하지 못 했지만, 번역은 지금까지 그래도 처음 번역 수업을 듣던 16년 여름부터 따지면 거의 6년 가까이 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딱 하나다. 도망치지 않고 버티기.
영국 체류 중에 원래 그나마 있는 내 기존 학위와 경력을 살려 개발자 일을 해 보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잘 되지 않았고(사실 이유가 뭔지는 안다) 밖에 나가는 게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인터넷으로 냅다 이리저리 이력서 돌리고 번역 일을 구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하면서 1) 어떻게든 돈은 벌어야 하므로 이 상황에서 회피/도망이 먹히지 않는 환경(한 달 월세가 런던 외곽이라 그나마 싸서 90만 원이었다) 2) 어떻게든 머리를 써서 이리저리 시도해 보고 ‘존중하며 버티기’를 했다. 외국에 나가 있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도망쳐서 회피성 취업을 했을 게 분명하다. 학교 졸업 후 음악 하겠다고 선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빈둥거리며 맨날 누워서 ‘스프링필드’ 게임이나 하다 돈이 너무 없어서 취업했을 때도 그랬고, 이후 두 번째 회사도 당시 다니던 국비지원학원에서 배우던 프론트엔드 개발이 너무 안 맞아서 그냥 냅다 기회를 봐서 스프링(자바) 유지보수 개발자 자리에 지원해서 지인 찬스로 입사했다.
내 삶의 큰 결정은 보통 뭘 하기 싫어서 피하면서 내려졌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그나마 하고 싶은 걸 좀 하면서 살 수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20대를 보냈던 기억이다.
기본적으로는 하고 싶은 게 있거나 생기면 그냥 하면 된다.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여러분이 혹시 과거 나처럼 하고 싶은 걸 해 본 경험이 전혀 없고, 그래서 전혀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우선은 청소하는 기분으로 내 인생에서 하기 싫은 것들을 전부 몰아내는 작업부터 해 보길 추천한다. 너무 하기 싫은 일, 정말 더는 만나기 싫은 친구 등등.
특히 효과가 좋은 게 사람이다. 꾸역꾸역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을 은근하게 정리해 본다. 그 사람이 꼭 나한테 뭘 잘못했다기보단 보통 인간 관계라는 게 타이밍이기 때문에 오늘은 은근하게 인연이 끊긴 사이라도 언제 또 좋은 기회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무 자르듯 툭툭 힘 주어 끊지는 않아도 괜찮다. 그런데 이렇게 주변에서 주로 만나는 사람이 정리가 좀 되면 신기하게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좀 더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일상의 다른 부분에서도 억지로 일하기보단 뭔가 좀 더 재밌는 일을 해 보고 싶은 욕구가 퐁퐁 솟아오른다. 그러면 욕구를 마중물 삼아 일단 한 번 냅다 뭐라도 도전해 본다.
나도 이 방법을 통해서 조금은 어영부영인 감이 있기는 해도, 번역 업계에 진입했고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고 해 보고 싶어하던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5년 전만 해도 내 주변에는 꾸준히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몇 명을 제외하면 전부 개발자 일색이었다. 테크니컬한 업무 외에는 나와 이렇다 한 관심사도 공유하지 않으며 나도 내 사생활을 오픈할 만큼 가깝지 않고 데면데면한 관계인 이들.
영국 체류와 코로나19 등으로 이런 관계가 대거 완전히 정리되면서 거의 허허벌판이 되니 오히려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근원적인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이 있으면 재밌고 편안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이 사람들과의 시간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해 나가는 동력을 얻고 있다.
인하우스 번역가들도 비슷하겠지만,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 번역가들에게는 고립되지 않는 경험이 특히 정말 이 일을 얼마나 더 할지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하다. 솔직히 ‘하고 싶은 일’이라는 마법은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는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라도 돈을 받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고, 일하는 과정에서 기쁨보다 쓸쓸함을 더 자주 느낀다면 이 또한 나를 쉽게 무너뜨린다.
그래서 나는 번역을 업으로 삼고부터 어릴 적처럼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할 뿐이지,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한다? 뭐,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예 가능성을 닫진 않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일의 우선순위는 1) 내가 편하게 먹고 자며 어느 정도 충분히 휴식한다 2) 힘든 일 없이 마음이 편하다, 이 두 가지를 앞설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게으르게 누워서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그리고 배 부르게 잘 먹고, 사람들과 적당히 (최소한의) 사회적 교류를 하고, 그런 다음에 좀 심심한 기분이 들 때, 아, 나 뭐 좀 해 보고 싶다. 이런 게 현재 내가 생각하는 옳은(?) 장래 희망의 우선순위다.
그리고 나는 번역을 통해 이걸 깨달았다. 내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사실은 음악도, 번역도 아니라 가만히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다 스르르 잠드는 일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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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뭐든 그냥 하면 된다는 걸 내가 처음 배운 것도 사실 2020년 민트리 님을 통해서였다. 지식이 아니라 경험으로 그걸 아는 이의 얼굴을 곁에서 직접 본 건 아마 그게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후로는 내 오랜 전매 특허(?)였던 '하고 싶은데 못 하고 있다'는 변명이 쏙 들어갔고, 나도 민트리 님을 부지런히 벤치마킹하며 하고 싶다면 그냥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삶이 제법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