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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다’는 열망: 음악

첫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장래 희망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뭐가 되고 싶은지 쓰라고 하시기에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썼다. 당시에 TV에서 한창 인기 있던 한 남자 가수가 자기를 그렇게 소개했는데, 어쩐 일인지 '저거다!'라고 생각했던 기분이 제법 선명하다. 물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알겠으니까, 그래서 정확히 되고 싶은 게 뭐니?" 사족이지만, 나는 적어도 6학년 때까지 '엔터테인먼트'가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다.


그러고 보니 영어 테이프 들으라고 사 준 라디오로 종일 라디오를 듣다가 엄마한테 압수당한 것도 딱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스마트폰은커녕 우리 집에 컴퓨터도 없었다. 우리 집의 가장 핫한 미디어는 1등이 TV였고, 2등이 라디오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가 가장 즐겨 들은 프로그램은 SBS 107.7MHz 〈영스트리트〉였는데, 역시나 '영스트리트'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처음에는 한글로 쓸 줄도 몰랐다.


이런 자잘한 기억이 이때껏 남아 있는 게 참 신기하다. 아무튼 당시 나는 피아노를 더럽게, 아니 대단히 못 쳤고 심지어 울렁증이 극도로 심해서, 피아노 학원 친구들이 한 번씩은 경험 삼아 나가던 피아노 콩쿨 한 번도 못 나갔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내가 음악을 하고 싶다고 아주 오랫동안(짧아도 한 15년쯤?) 생각한 건 어쩌면 그게 내가 절대로 하지 못 할 것이자, 절대 다가가지 못 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아주 묘한 원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미묘한 노선을 탔다. 이 마음이 깊어질수록 온갖 방법을 다 고민하면서 실제로 '음악을 하는 일' 외에 거의 모든 걸 다 해 본 것 같다. 그때는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 했던 그 감정은 어쩌면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내 특기는 점점 음악을 좋아하는 시늉을 제대로 하는 데에 특화되었고, 이러한 행동 유형은 꽤 오래 관성처럼 내 곁에 남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IT 엔지니어로 일을 시작할 즈음까지 음악에 관해서라면 이렇다 할 성취의 경험이 없었다. 성실한 연마를 통해 실력을 쌓는 방법을 깨우쳤을 리도 만무하다. 그래서 흔히 무대 체질이라는 친구들이 말하는, 무대에 올라가면 다 알아서 몸이 움직이더라, 같은 말이 내게 전혀 해당하지 않음을 한 오픈마이크 무대에서 피아노 반주로 나서며 아주 창피한 기억으로 배웠다(정말 노래를 잘하는 친구여서 당시에 끝나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아, TV 프로그램 오디션에도 한 번 나가 본 적 있다(결과는 예선 탈락). 근데 대체 왜 이런 자질구레한 얘기까지 쓰고 있는 걸까?


아무튼 나한테 '음악'은 "하고 싶다"는 원념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몸소 겪으며 답을 해 준 분야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면 아직까지 나는 가장 먼저 '음악'을 떠올리게 된다. 음악 이후로 그 어떤 것에도 집착적인 마음까지 품으며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못 하게 되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다행히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고, 나는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방법은 그냥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고, 지름길도 없다(있었다면 내가 기어코 찾아냈을 것이다).


이걸 깨닫는 데 거의 평생을 썼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투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새로 시작한 것들은 대체로 이렇게 한이 서릴 만큼 좋아하지 못 한 게, 그러기 전에 이미 해 보느라 좋아하는 마음 자체를 갈고 닦는 데 쓸 시간이 없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제법 산뜻하게 여러 활동을 즐기며 건실한 애정을 쌓는 법을 배워 가는 중이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분기점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대상(?)이 있는 건 제법 재밌는 일이기는 했다. 성인이 된 이후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내 돈으로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고(이후 학원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다), 또 몇 년 뒤 첫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돈을 쓴 곳도 피아노 수업이었는데, 그전까지는 계속 클래식 피아노만 배우다가 첫 회사 입사하면서 처음으로 재즈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회사 일이 힘들다는 핑계로 연습은 잘 안 해 갔지만(레슨 시간은 주로 야근 성토 대회에 가까웠다), 재즈를 좀 더 열심히 듣고 좋아하게 되면서 내가 무척 좋아하게 된 발상 하나가 있다.


재즈에는 기본적으로 틀린 음이라는 게 없다. 불편하게 들리는 소리도 그다음 연결로 멋지게 해결해 주면 그 음들이 한 데 어울려 훌륭한 음악이 된다. 그래서 때로는 익숙한 음의 나열보다 아주 투박하고 미끈하지 않은 음의 조합이 오히려 더 깊은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도 나는 다소 투박하고 이따금 이불킥을 날리기도 하는 기억들을 아름다운 선율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마다 피아노와 음악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1년에 한두 번 겨우 하던 간헐적 피아노 연습 주기가 슬슬 돌아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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