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왔을 때 잘 챙겨 먹어야 한다
6월의 끝자락이다. 어제는 더워서 자기 직전까지 찬물 샤워를 최소 세 번은 한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물 부족 공포증이 심해져서 설거지할 때도, 샤워할 때도 물을 최대한 짧게 쓰고 얼른 끄려고 노력 중이다.
아까 밥 챙겨 먹으려고 부엌을 서성이는데, 비가 오는 게 보였다. 오늘은 편지 부칠 일이 있어서 이따 우체국에 가야 하는데, 비 오는 날씨를 마주하면 관성적인 귀찮음이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래서 예전에는 비가 오면 집에 콕 박혀서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참, 그러고 싶을 때 그럴 수 있던 때가 있었다니. 마치 전생의 기억 같구만.
요즘은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 비가 오든 날씨가 푹푹 찌든, 내 건강을 그럭저럭 돌보는 수준으로 뭐든 내가 원하는 삶의 질서와 방향을 구축하고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엔트로피(자연의 에너지 흐름?)라는 게 가만히 있으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갈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현상유지라도 하려면 무조건 움직여서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떠서 뻐끔뻐끔 숨이라도 쉴 수 있다.
오늘처럼 우중충하게 비가 오는 날씨에 기분을 끌어올리기에 좋은 앨범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지금 듣고 있는 김에).
https://music.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nrDnYoVbdHFFSt-prJunXwVcSclBWFjUE&feature=share
이건 CD로도 갖고 있는데, 어느 새 맨날 스트리밍으로만 듣게 된다. 아주 노골적이지만 그냥 제목 때문인지 비가 오면 이 음반이 떠오르고, 비 오는 날 이걸 듣던 기억이 쌓이니까 또 다시 비가 오면 이걸 듣게 되고, 일종의 순환이 발생한다. 아무튼 뭐, 목소리도 피아노 소리도 아름답고, 듣고 있으면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하고 싶은 걸 꾸준히 하는 방법 중 하나는, 1) 내가 하고 싶은 걸 아무 거나 몇 개 정한다. 2) 그걸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한다. 비가 오든 햇빛이 나든. 잔고가 바닥이 나고, 기분이 지면을 뚫고 저 밑바닥까지 곤두박질하는 지경이 되더라도, 그냥 한다(Just do what you do).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기후 위기나 지구 멸망(사실은 인류 멸종), 전기세 폭등이나 인프라 민영화(사유화) 폭탄의 공포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틈틈이 내 자리에서 내 할 일을 야금야금 해 나가다 보면, 그래도 하루 중 어느 한 순간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내는 삶이 되는 게 아닐까 한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대체로 영국 날씨를 썩 선호하지 않는 건, 단순히 비가 자주 오고 우중충한 날이 이어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영국(및 주변국) 날씨는 대중이 없다.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던 하늘에서 별안간 비가 쏟아지거나, 절대 개지 않을 것 같던 하늘에서 별안간 해가 나는 등 예상이 잘 되지 않는다. 꼭 우리의 미래처럼…(?).
하지만 언젠가 배우 데이지 리들리가 보그 인터뷰에서 한 얘기에 용기를 얻어 말을 얹자면, 나도 이제는 영국 날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예상 가능하지 않은 매일의 날씨에 기민하게 대처하며, 그 속에서 오늘 할 일과 오늘 누려야 할 휴식을 내일로 유예하지 않는 법을 배운 탓인 것 같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강아지 산책은 절대, 절대, 미뤄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