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국 날씨는 프리랜서의 휴식을 닮았다

때가 왔을 때 잘 챙겨 먹어야 한다

6월의 끝자락이다. 어제는 더워서 자기 직전까지 찬물 샤워를 최소 세 번은 한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물 부족 공포증이 심해져서 설거지할 때도, 샤워할 때도 물을 최대한 짧게 쓰고 얼른 끄려고 노력 중이다.


아까 밥 챙겨 먹으려고 부엌을 서성이는데, 비가 오는 게 보였다. 오늘은 편지 부칠 일이 있어서 이따 우체국에 가야 하는데, 비 오는 날씨를 마주하면 관성적인 귀찮음이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래서 예전에는 비가 오면 집에 콕 박혀서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참, 그러고 싶을 때 그럴 수 있던 때가 있었다니. 마치 전생의 기억 같구만.


요즘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비가 오든 날씨가 푹푹 찌든,  건강을 그럭저럭 돌보는 수준으로 뭐든 내가 원하는 삶의 질서와 방향을 구축하고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엔트로피(자연의 에너지 흐름?)라는  가만히 있으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현상유지라도 하려면 무조건 움직여서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가라앉지 않고  위에 떠서 뻐끔뻐끔 숨이라도   있다.


오늘처럼 우중충하게 비가 오는 날씨에 기분을 끌어올리기에 좋은 앨범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지금 듣고 있는 김에).


https://music.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nrDnYoVbdHFFSt-prJunXwVcSclBWFjUE&feature=share

이건 CD로도 갖고 있는데, 어느 새 맨날 스트리밍으로만 듣게 된다. 아주 노골적이지만 그냥 제목 때문인지 비가 오면 이 음반이 떠오르고, 비 오는 날 이걸 듣던 기억이 쌓이니까 또 다시 비가 오면 이걸 듣게 되고, 일종의 순환이 발생한다. 아무튼 뭐, 목소리도 피아노 소리도 아름답고, 듣고 있으면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하고 싶은 걸 꾸준히 하는 방법 중 하나는, 1) 내가 하고 싶은 걸 아무 거나 몇 개 정한다. 2) 그걸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한다. 비가 오든 햇빛이 나든. 잔고가 바닥이 나고, 기분이 지면을 뚫고 저 밑바닥까지 곤두박질하는 지경이 되더라도, 그냥 한다(Just do what you do).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기후 위기나 지구 멸망(사실은 인류 멸종), 전기세 폭등이나 인프라 민영화(사유화) 폭탄의 공포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틈틈이 내 자리에서 내 할 일을 야금야금 해 나가다 보면, 그래도 하루 중 어느 한 순간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내는 삶이 되는 게 아닐까 한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대체로 영국 날씨를 썩 선호하지 않는 건, 단순히 비가 자주 오고 우중충한 날이 이어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영국(및 주변국) 날씨는 대중이 없다.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던 하늘에서 별안간 비가 쏟아지거나, 절대 개지 않을 것 같던 하늘에서 별안간 해가 나는 등 예상이 잘 되지 않는다. 꼭 우리의 미래처럼…(?).


하지만 언젠가 배우 데이지 리들리가 보그 인터뷰에서 한 얘기에 용기를 얻어 말을 얹자면, 나도 이제는 영국 날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예상 가능하지 않은 매일의 날씨에 기민하게 대처하며, 그 속에서 오늘 할 일과 오늘 누려야 할 휴식을 내일로 유예하지 않는 법을 배운 탓인 것 같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강아지 산책은 절대, 절대, 미뤄선 안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