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어 방학: ‘미란다’와 ‘해리 포터’를 중심으로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책이 별로 없었다. 책도 못 살 만큼 찢어지게 가난했다기보다는 그냥 책의 우선순위가 그다지 높지 않은 환경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슬슬 유행을 타던 초등학생 시절, 주변에서 드문드문 그런 게 있다더라, 얘기 정도나 듣던 이 이야기에 이렇다 할 흥미가 쌓이지 않은 탓인지 나는 성인이 된 후에야 이 책을 완독했다.
‘해리 포터’에는 별 뜻이 없었지만, 대신 당시 나는 아주 가끔 삼촌댁에 가면 책장에 줄줄이 꽂혀 있던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에 제법 심취해 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주 가끔 삼촌댁에 가야만 펼쳐 볼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좀 더 귀하게 여긴 것 같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로, 회사 생활하던 시기에 히드로 공항 WHSmith에서 남은 파운드를 탈탈 털어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를 몇 권 사온 일이 있었지만, 몇 년쯤 갖고 있다가 결국 얼마 전에 조카에게 주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나이만 먹었을 뿐인데, 월리가 그냥 너무 눈에 잘 보여서. 나는 어떤 책을 읽는 데 나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쪽이긴 하지만, 때로는 독서에도 때가 있기는 한가 보다.
요즘 TV에서 종종 ‘해리 포터’ 시리즈를 활용한 광고를 보다가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문화적 자본이랄 게 별로 없고, 책장에 꽂힌 책을 거듭해서 읽고 또 읽으며 보냈던 시절이.
지금이야 책도 내 맘대로 살 수 있고, 사는 방법 외에도 읽고 싶은 책을 구하는 나만의 방법을 다양하게 터득했다. 그리고 내 취향의 책을 고르는 안목도 훨씬 더 발전했고, 내가 원하는 문화적 자원을 찾아 감상하는 일에도 훨씬 더 능숙해졌다. 하지만 오히려 내 환경이 더 잘 갖춰질수록 이런 혜택을 누리는 일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더 짙어진다.
그래서 어느 덧 ‘해리 포터’가 유행이 아니라 고전에 속하게 된 2020년대, 여전히 ‘해리 포터’를 알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광고를 보면서 문득 들었다. ‘해리 포터’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문화적 경험을 전해 줄 만한 어른이 주변에 없는 청소년들을 떠올리면 그냥 어릴 적 내 모습이 적당히 왜곡 및 미화된 방식으로 떠오른다.
견딜 만한 결핍은 인간이 이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결핍을 결핍으로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이미 그 속에 깊이 잠겨 있는 삶에서, 문화의 힘을 통해 아주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아채고 나아가 각성하며 내가 속한 세계 속에서 변화를 꾀하려면, 적어도 구성원들이 새로운 세계가 존재함을 일깨우는 기회 정도는 어렵지 않게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책을 어렵지 않게, 만만하면서도 재밌는 수단으로 느끼게 할지, 이런저런 인식 개선 시도를 쫌쫌이 해 보려고 한다.
책 못지 않게, 영어 역시도 내게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 존재인데, 단순히 유창한 영어 실력을 쌓는 것 이상으로, 영어를 통해(혹은 또 다른 언어를 통해)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기회를 만나면, 우리의 삶은 ‘상전이’를 일으키며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 익히는 일에 유독 관심이 많다. 단순히 시험 성적을 위한 일시적 ‘공부’가 아니라, 영어라는 범용성 도구를 잘 활용하는 법을 익혀 재밌는 기회와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많이들 했으면 하는 바람이고, 나부터도 그런 삶을 꿈꾼다.
이런 마음으로 올여름에는(이제 약 한 달이면 금세 또 가을이 되겠지만) ‘영어 방학’이란 걸 해 보기로 했다. 방학을 한 번 지내고 오면 어딘지 확 바뀌어 있던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도 영어를 좀 집중해서 듣고, 말하고, 읽고, 써 보려는 계획인데, 사실 한참 전부터 생각만 해 놓고 정작 실행은 좀 뜨뜻미지근하게 이어지는 중이기는 하다. 이번 주부터는 좀 더 집중해서 하려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보고 있다.
‘영어 방학’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트콤 〈미란다〉 섀도잉과 함께, 《해리 포터》 시리즈를 독파할 야심찬 계획도 세워 봤는데, 잘 될는지 모르겠다. 이 기세로 가다가는 방학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그래도 틈틈이 진행 상황을 콘텐츠로 만들어서 이리저리 전파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