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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어 학습 일대기 (7) 〈끝〉

영어 독학자의 기쁨

감기가 아직도 안 나았다. 거기다가 기운이 부쩍 떨어져서 널브러져 있다가 겨우 일어나서 한바퀴 뛰고 들어왔다. 어릴 적부터 시작된 내 만성 우울증은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을 줄 알았더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쩐지 그 증상이 변모하고 있다. 요즘은 배터리가 방전돼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 느낌인데, 배터리 충전에 달리기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왜 운전 면허도 없으면서 매번 이런 비유만 떠오르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영어의 '영'자로 시작하는(?) 영국씩이나 다녀왔는데, 거기서 영어가 딱히 늘지 않았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좀 충격이었다. '영어 하는 나라에 가도 영어가 늘지 않을 수 있다.' 사치스러운 비용을 치르고 얻은 이 깨달음이 다행히 내게 쓸모 있는 추론으로 이어져서 그때부터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본격적으로 했다. 그 깨달음이란, '영어 하는 나라에 있지 않아도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 시점부터 유튜브에 올라온 '영어 독학자'들의 유창한 스피킹을 구경하는 것이 내 소소한 취미 하나로 추가되었다.


이때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영어로 말하는 스터디를 열어서 코로나19 시국에 마스크를 쓰고 모여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오픈채팅방에서 영어로 말하는 녹음 파일을 서로 인증하는 모임도 시작했다(2020년 여름엔가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까 벌써 2년을 넘겼다). 여기서 얻은 두 가지 유용한 교훈이 있는데, 하나는 우연히 오픈채팅방에 올리려고 책을 읽기 시작한 게 의외로 내 영어 말하기 실력을 쌓는 데 제법 도움이 됐다는 것이었고(활자로 된 영어를 내가 입으로 소리 내면서 여러 발음을 좀 더 입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고, 내가 줄줄 읽는 말을 내 귀로 듣는 게 또 의외로 좋다. 내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좀 더 의식적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요즘 열심히 활용하고 있는 건데, 영어 말하기 상대를 누구로 정하느냐가 내 학습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에서나 영국에서나 내 말문이 막히거나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으면 모든 원인을 그냥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 해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언어는 무조건(?) 편안한 상태에서 가장 좋은 아웃풋이 나오는 법이다. 긴장하면 아는 것도 제대로 말하기가 어려우니까. 이걸 인지하고부터는 그냥 내가 그동안 편안하지 않은 상대와 영어를 연습하거나 대화할 때가 많아서 말하는 게 힘들었구나, 하고 나를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요즘이 내가 살면서 (영국문화원 어학원 다닐 때랑, 영국 체류 시기 포함) 영어로 말할 일이 가장 잦아진 시기인데, 하나 팁을 전하자면, 순서를 바꾸면 된다. 영어로 + 이야기 나눌 사람을 찾는 대신, 함께 재밌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 중에서 영어에 관심이 있을 법한 사람을 수색(?)하는 전략이다. 어차피 영어로 하는 대화는 상대의 학습 정도와 별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게 되기 때문에, 나와 학습 정도가 크게 차이 나더라도 괜찮다. 이야기가,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면 그때부터 영어는 정말 단순한 도구 정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하나 신기한 건, 재밌게 영어로 대화 나눌 상대를 찾고 있다는 게 주변에 소문이 좀 나기 시작하면(본인이 직접 소문을 좀 내긴 해야 한다) 고맙게도 새로운 사람을 소개 받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렇게 직접 사람을 대면해 대화를 나눌 때는, 내가 영상이나 책 같은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운 표현을 직접 써 보면 좋다. 처음엔 좀 어색할지 몰라도, 어느새 내가 매일 쓰던 말인 것처럼 입에 달라붙으니까.


영어도 마찬가지다. 이런 걸 진짜 쓰나? 싶은 말들을, 내 입으로 직접 뱉는 경험을 쌓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냥 영어 쓰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진심으로 영어가 고민이었던 분들은 그냥 오늘부터 냅다 시작해 보길 추천한다. 영어는, 언어는 원래 잘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것이지. 그러니까 쓰기로 정했다면, 그때부터 그 언어는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잘하게 되어 버린다. Water is wet.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제 슬슬 감기가 떨어질 참이라서 감기와 함께 시작된 영어 독학 이야기는 이쯤에서 매듭지어 볼까 한다. 마무리는 '물' 얘기로 해야지(Speaking of water...). 예전에 처음으로 영국항공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관광을 갈 적에 승무원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그동안 배운 대로 '워러ㄹ'라고 할까, 아니면 새로 배운 발음대로 '우어터'라고 할까 무진장 고민하다가 그냥 '워러ㄹ' 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사귄 친구랑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영어 악센트를 고민하길래, 어차피 대도시에는 딱히 특정 지역 악센트랄 것이 없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러니까 딱히 그런 걸 만들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나만의 억양을 만들어 보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다(=내 경우). 그런 얘기를 하면서 이 '워러' 이야기를 예시로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기내에서 물 달라고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이런 걸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내 말투대로 이야기하겠지. 전두엽의 낯간지러운 감정을 무릅쓰고 계속 용기 내서 영어로 말하다 보면 결국 나만의 영어 말투가 생긴다. 그러니 다들 견디고, 그냥 일단 써 보시길. 잘 쓰고 싶다면 이미 잘 쓰고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따라 하면 된다. 이젠 이것 외에 언어 학습에 더 필요한 게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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