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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리 Mar 19. 2023

상담 그 따위로 하지 마세요.

네.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월 2회 상담을 나간다. 유난히 거칠게 상담했던 그날은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기어코 5분을 지각한 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뛰면 늦지 않을 거리였지만, 센터 상근자에게 5분 정도 늦을 거라 말하고 걸어갔다. 뛰기에는 몸이 너무 피곤했다.


도착하자마자 물 한 잔을 마시고, 물을 마셨던 잔에 커피를 탔다.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전날 밤을 회상했다. 피곤했다.


상담 나온 날에는 정말이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언제 울릴지 모르는 전화벨과 전화벨을 멈추기 위해 잡은 수화기 너머 어떤 말을 할지 모르는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 오는 긴장감, 그리고 전화를 끊으면 몰려오는 피곤함. 언제까지나 친절하게 상담하겠다고 다짐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반년 전쯤부터는 나도 꽤나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하고 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반시간만 지나면 퇴근을 앞둔 무렵 산재로 손목 통증이 심하고 엄지손가락이 잘 들리지 않게 된 재해자가 연락해 왔다. 업무 중 발생한 사고였기에 산재는 인정됐으나 1년에 4번 수술했고 장해등급 12급(12급은 14등급 중 낮은 등급이다)이 나와 심사청구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상담내용은 심사청구의 내용이 아니었고, 회사의 대응에 관한 것이었다. 현장직이었기에 장해를 갖고는 업무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회사에 실업급여라도 수급할 수 있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불통으로 일관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자발적 퇴사를 앞두고 있다는데, 괜히 울컥했다.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고개도 뒤로 젖혀 양옆으로 꺾어보다 답답한 나머지 쏘아붙였다. "회사도 잘못한 겁니다. 업무 중 다쳐서 손도 잘 못 쓰게 됐는데, 그런 근로자한테 그 정도를 못하다니요, 산안법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걸로 소송해도 모자랄 판에... 선생님, 회사에 너무 저자세로 하지 마시고 강하게 말하세요."


오후 4시 50분, 10분만 지나면 퇴근인데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사측담당자. 다음은 대략적인 전화내용

- OOO씨 전화받으셨나요?

- 이름 말씀하신 분은 없었는데요.

- 산재 근로자요.(아, 네 방금.) 그분이 다짜고짜 권고사직처리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 아, 네. 회사에서 실업급여 수급하는데 협조해 달라고 말씀하시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네요? 병가 불승인으로 인한 사유나 권고사직 등으로 실업급여 받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 아, 근데 너무 공격적으로 말씀하시길래...

- 근로자분께서 회사에 말하길 어려워하셔서, 회사가 산안법상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걸로 소송해도 모자랄 판이라고 말씀드리긴 했네요.

- 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 (?)

- 아니, 산안법이 워낙 촘촘한데 거기에 자유로운 회사가 어딨어요? 그리고 산재가 발생하면 무조건 회사 책임인가요?

- 저는 1년 동안 수술받아야 하는 재해를 당하시고, 장해까지 생겼다기에 원칙만 말씀드린 겁니다.

- 구체적인 상황도 모르고 그렇게 상담을 하세요? (웃으며)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  웃으면서 말씀하실 내용은 아닌 거 같은데요? (.. 말실수를 좀 했다)


이후 철문을 끼익- 하고 나가는 소리. 씩씩거리는 소리. 전화한 사람이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얼마 뒤 고성을 지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상담 그 따위로 하지 마세요!', '산재 나면 무조건 다 회사 잘못인가요?', '그 사람이 손 넣은 건데!!!', '우리도 수술비로 천만 원은 썼다고요!', '아, 제가 화 내서 죄송하고요.'... 잠잠하다 싶더니 또.. '아, 진짜! 그렇게 (근로자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나한테 화 낼 상황은 아니라고 하니,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멍했다. 정말 이렇게 상담하면 안 되는가를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화를 들으니, 얼떨떨해서 상담자리를 정리하고 왔는지 아닌지도 헷갈리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짧았던 것만 기억난다. 찝찝한 마음에 혼자 술 한 잔 하려다 운동한 건 잘한 일 같고. 그러다 자기 전 머릴 말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게 상담 안 해야겠어요. 더 잘 듣고, 더 강하게 상담해야겠지요. 요새 좀 부족하게 상담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욕 들으니 조금은 잘해왔다고 생각이 들어요. 당황스러우셨지요? 그분은 1년은 더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네. 그 따위로 상담 안 하겠습니다.'  (어떤 날 속 좁은 상담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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