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필사
1월 1일 ~ 5일. 오랜만에 집을 4일씩이나 비우고 제주도에 다녀왔다. 결과적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던 좋은 기억. 그래서 나와 올림픽의 올해는 1월 6일 시작됐다.
1월 7일은 동가(미래의 동거가족, 올림픽은 아직까지 택이네 조개전골로 칭한 카카오톡 대화방) 모임을 했다. 4명, 나, 올림픽, 간지남, 나쁜손님. 10년 내 4인 동거체제를 꿈꾸며 결성된 모임은 이렇게 뜻깊은 날에 종종 모인다.
만나자마자 점심도 먹지 않고, 신년 계획을 세웠다. 간지남은 신년 계획 100개 세우기, 나쁜손님은 분기별, 올림픽은 구획별, 나는 별생각 없음. 각자의 방식대로 신년계획을 세웠다. 나는 1번부터 17번까지 그냥 쭉 썼다. 나름 한해 계획이 정리되고 서로의 한해 계획을 공유하고, 격려했다. 좋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끝나버린 신년 계획 세우기, 그래서 누가 제안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필사모임을 하기로 했다. 아마 올림픽인 듯하다. 필사모임은 당연히 하기로 했고, 누군가와 같이 하자고 말했다가 몇 초도 안 돼 그냥 우리끼리 하기로 했다. 4인 체제 필사모임 시작!
모임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모임 작명이 화두다. 맨 처음 나왔던 모임명은 아무튼, 필사. 근데 너무 베끼기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튼 시리즈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단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결국 우리는 막 던지기 방식을 채용했다. 나는 이런 식의 의견내기를 잘 못하지만 나쁜손님의 활약으로 20여 개 부사가 나왔다. 인상 깊었던 모임명 몇 개를 꼽자면, <이렇게나>, <적어도>, <또>, <뭐든지>, <그래>, <아무렇게나>(아무튼 아류), <슬슬>, <살살>, <그냥>... 결국 투표에 부쳤는데 <멋대로>가 나왔다. 나쁜손님과 올림픽의 선택, 이 둘은 항상 잘 맞는다.
그러나 이 둘과 잘 맞지 않는 간지남과 나는 <멋대로>가 맘에 들지 않는다. 특히 간지남이 필사적으로 반대권을 행사했다. 다수결을 표방했지만 사실 unaniomous체제로 결정하기로 잠정합의되어 <멋대로>는 부결됐다. 그래, 다수결보다 만장일치체제가 더 민주적이니까. 그렇지만 사실상 간지남의 횡포였다. 이후로 간지남이 제시한 모임명은 <앗>, <개같이>, <좆같이>, <막>... 필사모임을 하자는 건지? 그의 항변은 '나는 그냥 진짜 막 하고, 그만두고 그래도 괜찮은 이름이 좋아'라고 뭐 대충 이렇게 말했던 듯? 필사 모임명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이미 나왔던 모임명 중 서로 마음에 드는 단어를 말하길 약 5분, 배도 고파져가고(이미 1시 30분쯤 됨), 누군가 <<거북이>>를 꺼냈는데? 마음에 드는 거다. 그래서 나는 나쁜손님 보고 꼬북이를 닮았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까 우리 넷 다 각기 방식으로 거북이를 닮은 거다. 그래서 거북이로 하기로 했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하는 게 좋다고, 그리고 거북이도 닮았고, 배도 고프고, 간지남의 횡포도 어쩐 이유에서인지 사그라들었고. 그래서 <<거북이 필사>>가 됐다. 모임명도 늦게 만들어져서 거북이처럼 느리게 2시 넘어서 닭도리탕을 먹었다.
필사모임이 시작된 밤, 올림픽이 요란한 첫 시작을 알렸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경향신문 손제민 논설위원의 글. 그중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구절이 맘에 들었다. '~블라블라,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그것을 계속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늘 예외적인 삶을 꿈꾸고, 이단아가 되길 바라고, 변방의 누군가가 득세하길 바라는 나에게 딱 꽂힌 문구. 아 그래, 필사 모임은 훔쳐 읽는 것이구나, 음흉한 거북이 필사 모임이 기대된다. 거북이지만 느릿느릿 결국 음흉하게 완주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