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답다는건 없다
월 500시간 남짓 사업장에 체류하며 일했던 분의 임금체불 사건을 맡았다. 한 달 30일, 720시간 중 500시간을 사업장에서 일했다. 평일 7만원(15시간 체류), 토요일 10만원(18시간 체류), 휴일 10만원(24시간 체류, 연휴에는 며칠이고 사업장에 머물렀다.)을 받으며 3년 가까이 일했던 그는 첫 상담에서 장시간 노동에도 20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며 부당함을 참았던 자신의 과거를 하소연했다.
노동청 출석 전날, 진정인과의 통화를 끊으려던 순간 진정인의 마지막 말에 흠칫했다. “그런데, 감독관이 왜 참고 일해왔냐고 물으면 어쩌죠?” 찔렸다. 실은 진정인과 상담할 때 비슷한 질문이 떠올랐던 것도 사실이다. 짧은 침묵 끝에 “그런 질문은 해서도 안 되고요, 그런 질문하면 제가 답하겠습니다. 안 되죠, 그런건.”이라고 닥칠 일도 모르고 호기롭게 답했다. 진정인은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3년을 일했다고 했다. 기대감을 미끼로 착취당했다.
출석 당일, 진정인은 단호히 진술을 이어갔다. 자신이 해왔던 일들, 열악한 업계 관행보다도 더 적게 지급됐던 임금, 당직근무자에 대한 차별 등 차분하고 분명했다. 그렇게 조서가 거의 다 작성되어갈 무렵, 감독관으로부터 우려했던 질문이 이어졌다. “당사자와 대리인이 기분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왜 그렇게까지 참고 일하신 거예요?” 기분 나쁠지 알았으면 하지 말아야 했다. 잘 말씀하고 계시던 진정인을 막아 세우고 대답하려던 찰나, 진정인이 한숨을 쉬더니 거의 읊조렸다. “정규직, 비정규직 차이가 심했어요. 근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일을 잘 했구요. 그래서 정규직 직원이 3차례에 걸쳐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했던 말을 믿었었죠. 부당한지 알았지만 참았고요.” 그렇게 조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진정인은 후련했다고, 앉아만 있었던 내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사회적 약자가 문제를 제기할 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을 줄곧 봐왔다. 자신의 권리 하나 제대로 못 찾고 이제 와 공론화한다는 비아냥, 정반대로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문제 제기를 목적으로 참아왔다는 의혹의 눈초리. 약자들은 그때마다 다시 한번 과거의 그때를 마주하며, 위축되거나 결백을 증명해야하고, 권리임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무기력을 또 다시 경험한다. 그중 노동자, 특히 행정체계나 사법체계를 이용하여 구제받으려는 노동자는 가차 없는 약자혐오에 갇힌다. 왜 대응하지 않았는지 추궁하고, 진정을 위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지 의심받는다. 구제받으려는 노동자에게 조사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이다. 대응할 수 없어 못 했고, 알아도 말 못 하는 노동자를 헤아리려는 노력은 부재하다.
부재한 노력 앞에 노동자는 부단한 노력을 강요당한다. 증거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대리인을 선임하고, 서면을 내고, 노동청 등에 출석하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을 가해자를 대면한다. 강요된 강한 약자가 되어가는 노동자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왜 알면서 참아왔는지, 어디서 돈 좀 벌었다는 이야기를 흘려들은 건 아닌지를 의심당한다. 훔쳐진 권리찾기 과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렇게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얻는 결과는 ‘원래’부터의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게 전부다. 정말이다. 그마저도 잘 풀려야 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노동자는 늘 편견과 혐오에 시달린다. 올 한해는 이를 무릅쓰고 ‘약자답지’ 않으려 한 노동자를 유독 숱하게 접했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의 원직복귀명령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자리라며 ‘프리랜서’로 복귀시킨 CBS와 투쟁하는 최태경 아나운서님, 드라마 제작현장의 악습을 고발하며 싸우는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 조합원분들, 먼발치서 봐온 부조리와 불합리에 투쟁하는 노동자들. 그들이 맞서는 편견과 혐오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되지 않지만, 되지 않을 것만 같은 지난한 싸움을 이겨내는 그들을 보면서 연대하는 약자들이 결국 이기는, 본래 자기 것인 권리를 되찾는 결과를 쟁취해내는 결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들의 투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가고 있다. 투쟁을 조직하고, 투쟁하고, 좌절하고, 다시 투쟁하고, 다시 반복하고. 그럼에도 그들이 그대로 ‘약자답지 않기를’ 바라본다. 약자답지 않은 약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걷히고, 그들에게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그래서 ‘약자답지 않은 약자’가 특별해지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