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리 Nov 29. 2021

노동 사건(일희일비, 송곳, 손잡이, 채찍, 다짐)

반복하지 않으리라

한 동안 뜸했던 블로그에 새글을 쓸 일이 생겼다. 

한 동안이 얼마 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마지막 글이 6월 8일이니 근 2달 가까이다. 

글을 안 올린 변명이야 수도 없이 댈 수 있지만, 1가지 이유만 대라고 다그친다면 게을렀다는 이유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누가 다그치진 않았지만). 게으름을 뒤로 하고 남겨야 할 일이 있어 적는다.  


난 노무사로서 노동사건을 대리한다. 다만, 짧은 경력에 짧은 사회 생활, 날카롭지 않은 촉과 최대 1분 남짓 집중할 수 있는 단점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결국엔 '왕초보이자 산만한 노무사'로서 노동사건을 수행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런 점을 알 턱이 없는 의뢰인은 나에게 사건을 맡겨버렸다. 그래서 난 나를 속이며 사건에 임했다. 나를 속이는 방법이야 많겠지만 그 중 한 가지는 단점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흔하디 흔한 마인드 컨트롤이다. 여기서 짧은 경력과 사회생활은 '패기'로, 날카롭지 않은 촉과 1분 남짓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찰나의 순간을 집어내는 '예리함'인 진짜 능력으로 바뀐다. 난 나를 속여 '패기와 예리함을 쥔 노무사'가 된다.  


이렇게까지 나를 포장했으니 사건결과에 대해 먼저 쓰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그 끝을 말하자면, 결국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엄격히 따져보면 졌다. 졌다고 쓰기 싫다. 괄호를 빌린다.). 결과야 그렇다치고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애매한 결과를 초래한 그 과정을 돌이켜보고자 함이다.  


먼저, 나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 독이 됐다. 내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믿음은 사건의 첨예한 대립을 이길 수 있는 공방의 우세에 있지 않았고 단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입김만으로도 형태가 바뀌는 휴지쪼가리와 같다. 사측은 휴지쪼가리에 입김이 아니라 물을 끼얹었으니 이길리 만무했다. 


근거 없는 믿음은 결국 나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진 것 같다, 의뢰인에게 어떻게 말하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나를 믿고 의지하고 있는 의뢰인에게 나약한 소리를 했다. "한 번 더 생각해보죠, 쉽지는 않아보여요." 그러면서, 구차하게 차선책을 말했다. 사실 여기서 했어야 할 말은 "지더라도 끝까지 가보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날 저녁 몸살을 앓았다. 내가 한심하기도 했고, 깊이 생각해보니 전혀 불리할게 아니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왜 의뢰인에게 나약한 소리를 했을까 자책했다. 한여름에 떨며 잤다. 


다음날 출근 후 앓다 점심무렵 휴가를 쓰고 집으로 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몸도 아팠다. 그래서 또 잤다. 그 다음 날은 사건을 뒤집고자 보충서면을 휘갈겼다.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쓰여지는 글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셌다. 마음이 한결 나았다. 질 것 같지 않았다. 이기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어보였다. 희망에 차 의뢰인에게 전화했지만 연락이 닿질 못했다. 


"선생님, 조사가 길었었는데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다음 날에야 목소리가 닿았다. 첫 인사로 건강을 물었다. 나처럼 아팠을까. 의뢰인은 전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사측과 합의에 다다랐다 했다. 사건 결과와는 별개로 합의를 한다고 했다. 합의의 내용은 겉으로 보기엔 크게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미 쓴 보충서면은 출력되지도 못한 채 컴퓨터 속의 파일로만 남게 됐다.   


패착의 원인은 일희일비, 아래 있지 못하고 위로 붕 뜬 감정의 무게추 때문이었다. 애초에 흔들리는 속성을 가진 추인데, 위로 뜬 추는 외부에서 흔들지 않아도 혼자서 흔들린다. 심지어 외부에서 흔들면 그 추는 요동친다. "끝까지 가보죠" 한 마디가 어려웠을까? 혼자 판단해서 마무리 짓는 일은 절대 상대방을 위한 배려가 아니다. 심지어 그 판단이 일희일비하는 감정에 기인했다면 배려보다는 기만에 가깝다. 이런 실패는 다신 없어야 한다.  


웹툰 송곳에서는 다음 일이 두려우면서도 기어이 뚫고 나오는 사람을 '송곳 같은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조직생활에서 불의를 참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곳은 날카롭지만 가늘어 약할 수 있다. 난 그럴 때 조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난 그저 대리인이기에 송곳만큼은 날카롭지 못하다. 그러나, 송곳이 원하는 곳을 찌를 수 있게 강하게 지탱해주는 손잡이가 될 수는 있다. 그저 송곳이 향하는 끝을 틀어지지 않게하는 두꺼운 손잡이가 되면 된다.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송곳을 틀어지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한다. 든든하게 받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이 내게 채찍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작가의 이전글 정리해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