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 스피어에서
2024년 1월, CES 참관차 라스베가스에 머물렀다. 빽빽한 일정 속에서 주말이 찾아왔고, 긴장했던 감각이 이완되는 순간 거대한 구체 하나가 도시의 불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Sphere. 저녁 무렵이 되자 그것은 블랙홀처럼 도시의 모든 시선을 빨아들였다.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알았다. 이곳은 인간 감각의 한계를 시험하는 공간이었다.
18K 해상도의 곡면 스크린이 360도로 시야를 덮고, 빔포밍 음향이 방향 감각을 교란시킨다. 좌석은 진동하고, 때로는 바람과 냄새까지 동원된다. 빛과 소리, 진동이 끊임없이 쏟아질 때 나는 '본다'는 능동성을 잃었다. 그저 '감각된다'는 수동의 상태로 밀려났다.
U2의 록 사운드와 지구의 영상이 펼쳐질 때, 뇌는 정보 처리에 급급했고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포기했다. 메를로퐁티가 언급한 '몸의 도식'이 재프로그래밍되는 지점이었다. 더 이상 내가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이 설계한 세계가 나의 망막과 고막을 통과하며 스스로를 지각했다.
근대 건축이 형태로 공간을 구획했다면(르 코르뷔지에), 현대 건축이 빛과 재료로 경험을 빚어냈다면(안도 다다오), 스피어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지각 자체를 프로그래밍한다. 건축가는 이제 감각 엔지니어가 되었다.
수만 개의 LED 픽셀은 인간의 시야각을 정교하게 계산하여 모든 시선을 채우고, 음향은 좌석마다 다르게 청각을 조율한다. 이곳에서 지각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밀리초 단위로 설계되는 데이터의 결과물이다. 들뢰즈의 '감각블록'을—재현이 아니라 직접적 강도로 우리를 관통하는 감각 덩어리를—18K 픽셀과 알고리즘으로 구축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완벽함은 불편한 질문을 동반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경험은 진정한 체험인가, 아니면 프로그램된 반응인가? 18,600명의 관객이 동일한 시청각 자극을 받는 이곳에서, 경험의 민주화와 경험의 획일화 사이 경계는 어디인가?
스피어를 나와 라스베가스의 밤공기를 마셨을 때, 세상이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빛의 밀도도, 소리의 방향도 단조로웠다. 스피어의 완벽함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감각이 그 완벽함에 단 두 시간 만에 길들여진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한 번 상향 조정된 감각의 기준선은, 다시는 내려오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호텔 창밖 풍경은 채도가 20% 낮아진 것처럼 보였다. 18K 해상도에 익숙해진 눈에, 현실은 저해상도 영상 같았다.
건축은 공간을 짓기도 하지만, 이제는 감각을 짓는다. 그리고 그 감각 안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완벽하게 조율된 감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게 보는 존재'일 수 있는가?
CES는 매년 열린다. 2026년 1월에도 많은 이들이 라스베가스를 찾을 것이고, 그들 중 누군가는 스피어 앞에 선다.
하남에도 스피어를 짓는다는 계획이 있다. 2027년, 아시아 최초로. 실현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구체는 반드시 어딘가에 떠오를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완벽하게 조율된 감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 자유로운가.
스피어에는 그림자가 있다. CNN은 "생각을 멈추게 하는 콜로세움"이라 불렀다. 런던은 빛 공해로 거부했다. 21,000가구 분의 전력을 소비한다.
스피어는 라스베가스의 산물이다. 그곳의 조건이 스피어를 가능하게 했다.
건축은 맥락이다. 다른 장소에서는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장소성, 지속가능성, 공공성.
그 질문 없이 지어지면 경이로움은 쇼장이 될 뿐이다.건축은 복제가 아니라 번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