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가 던지는 윤리학적 질문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꽤 오래전이다. 그땐 단지 마음이 먹먹했다. 청각장애를 가진 소녀와, 그녀를 괴롭혔던 소년의 이야기. 그런데 요즘 들어 문득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세상이 변한 듯해도, 사람 사이의 불편함과 침묵, 그 공기는 여전히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내게 단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마음 한켠에 묻어둔 조각 같은 작품이다. 언젠가는 글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건,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죄책감과 용서의 과정을 통해 나 역시 잊지 못한 '어떤 시절'을 다시 꺼내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때는 친구들이 누군가를 놀리는 게 당연했고, 선생님들의 체벌도 일상이었다. 놀림을 당하는 아이는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고, 우리는 그 공기를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누구도 악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선하지 않았던 그 시절.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아리다. 그때의 공기와 감정, 무기력과 침묵이 그대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불편함은 단순히 이야기의 잔혹함 때문이 아니다. 그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며 자라온 우리 세대의 집단적 기억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학교 폭력은 여전하고,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의 X표들이 누군가의 얼굴을 지운다. 우리는 여전히 불편한 타자를 외면하고, 침묵으로 동조하며 살아간다.
이시다 쇼야(남자 주인공)는 사람들의 얼굴 위에 X표를 그리며 세상과 단절한다. 그의 고개 숙인 모습은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윤리적 회피의 표정이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말처럼, '타자의 얼굴(Visage)'은 나에게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하는 존재의 부름이다. 그 얼굴을 지운다는 것은, 타자에게서 비롯된 윤리적 부름을 거부하는 행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의 시작은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쇼야는 쇼코에게 다가가 수화로 "친구하자"고 말한다. 그 짧은 순간,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타자와 마주하겠다는 결단, 그것이 그를 죄책감의 과거에서 책임의 현재로 이끄는 회복의 언어였다.
쇼코(여자 주인공)의 미소는 다정하지만, 동시에 깊은 슬픔을 숨긴다. 그녀는 언제나 미안하다고 말하고, 괜찮다고 웃는다. 그러나 그 미소는 진심이 아니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자기기만(Mauvaise foi)'의 한 형태다.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자신을 결정된 존재로 속이는 것, 그것이 자기기만이다.
쇼코는 "나는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존재"라는 믿음에 갇혀 있다. 그래서 괴롭힘을 당해도 자신을 탓하며, 고통을 느낄 자격조차 스스로 거부한다. 그녀의 미소는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감시의 표정'이다. 사르트르의 시선(Le Regard) 개념으로 보자면, 그녀는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규정하며 '착한 사람'의 역할 속에 자신을 가둔다.
역설적이게도 쇼코의 자살 시도는 타자를 향한 극단적 책임 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주체가 타자를 위해 인질이 되는 것을 윤리의 근원으로 봤다. 쇼코의 과잉된 미안함은 이 윤리적 책임감이 자기파괴로 전도된 비극이다. 그녀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우려 한다. 타자를 위한 대속이 자기소멸로 왜곡된 순간이다.
쇼야가 X표를 뗄 수 있었던 건, 쇼코의 자살 시도를 겪은 이후다. 자신이 구원하고자 했던 이가 자신 때문에 죽으려 했다는 극단적 책임의 체험. 레비나스적으로 말하면, 타자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주체가 각성하는 순간이다. 그는 쇼코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의식을 잃는다. 그 대리 수난이 그를 변화시켰다.
영화의 마지막, 쇼야는 세상의 모든 얼굴 위에 있던 X표를 하나씩 떼어낸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들고, 타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도망치는 소년이 아니다. 타자 앞에 서 있는 책임지는 인간, 그 자체다. 쇼코 또한 미소 대신 필담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언어로 세상과 연결된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오래된 교실의 공기를 떠올렸다. 서로의 상처를 외면하며 웃던 얼굴들, 침묵으로 동조하던 친구들, 그리고 그 속의 나.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얼굴 위에 X표를 붙였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채 살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불편함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침묵으로 가해에 동조한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SNS에서, 우리는 여전히 X표를 그리며 살아간다.
<목소리의 형태>는 말한다. "고개를 들어라. 타인을 보고, 자신을 보라. 그리고 목소리를 내라." 그건 영화 속 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윤리적 명령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영화를 다시 꺼내 쓴다. 불편함을 마주하는 이 글 한 편이 그때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이자 다짐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