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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etters of Us

사랑의 거리, 상대를 알고 찾아가는 일

개와 늑대의 시간, 시바견이 알려준 깨달음

by Jwook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일 같지만, 사실은 거리를 배우는 일이다. 너무 가까우면 숨이 막히고,
너무 멀면 마음이 식는다.
그 사이, 적당한 간격을 찾는 것 — 어쩌면 그게 진짜 사랑의 시작일지 모른다.

개와 늑대의 시간, 그리고 사랑의 거리


최근 TV에서 우연히 본 〈개와 늑대의 시간〉이 내게 깊은 성찰을 안겨주었다. 강형욱 훈련사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그날 본 시바견의 이야기는 또 다른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보호자의 사랑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라는 것.


내가 시바견에게 끌린 이유


평소 언젠가 반려인이 된다면 어떤 개를 키울까 생각할 때면, 늘 1순위는 시바견이었다. 소형견과 중형견 사이 애매한 크기(8-11kg)에, 도도하고 멋진 자태, 거기에 치명적인 귀여움까지. 시바견은 내게 완벽한 존재였다.


그런데 화면 속 시바견들은 내 상상과 달랐다. 보호자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만지려 하면 공격적으로 물어뜯었다. 보호자들은 당혹스러워했고,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날 거부하는 걸까?"


강형욱 훈련사가 설명했다. 시바견은 독립적이고 고양이 같은 개라고. 자기만의 영역과 소유욕이 강하며, 원치 않는 스킨십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고. '만지지마 시바'라는 별명이 괜한 게 아니었다. 늑대의 본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존재. 그게 시바견이었다.


더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었다. 시바견 같은 강한 성향을 가진 아이들은 오히려 마초처럼 강한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 한없이 주는 사랑 앞에서는 오히려 비웃듯 제멋대로 행동하고, 입질은 더 심해진다는 것.


그 순간 화면 속 보호자들의 얼굴이 다르게 보였다. 그들은 틀린 게 아니었다. 다만, 사랑하는 방식이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실수


보호자들은 시바견을 끌어안고 입맞추며 온갖 사랑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시바견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사랑받는 게 아니라 침범당하는 표정이었다.

"난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보호자들의 하소연이 화면을 채웠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사랑'의 방식에 있다는 걸,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원치 않는 애정은 스트레스가 되고, 과한 간섭은 반항을 낳으며, 강요된 복종은 관계를 파괴한다. 결국 그건 상대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보호자가 느끼고 싶은 감정을 채우는 일방적인 욕구였다. 화면을 보다 문득 깨달았다. 사람 사이도 다르지 않다는 걸.


상대를 세심히 관찰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만 사랑을 밀어붙이면, 그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소통 없는 일방적인 사랑은 부담이 되고, 때로는 폭력이 된다.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가.


나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가니 반려동물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혼자 사는 집이 너무 조용했고, 퇴근 후 반겨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서면, 나를 반기며 꼬리 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주말엔 함께 산책하고, 외로울 때 끌어안고 위로받는 모습을. 하지만 시바견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가가면 피할 것이고, 안으려 하면 으르렁거릴 것이다. 그때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라며 서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내 외로움을 달래줄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화면 속 보호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시바견의 도도한 표정이 그제야 이해됐다. 저건 냉정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몸부림이었다.


사랑은 상대를 알고, 거리를 아는 것


비반려인으로서 이런 성찰을 하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짜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다. 시바견에게 필요한 건 끊임없는 스킨십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였고, 복종을 강요하지 않는 단단한 리더십이었다.

거리를 둔다는 건 무관심이 아니라 존중의 표현이다.

그건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고 매일 연락하고, 모든 걸 알려고 하고, 내 방식대로 보살피려 드는 게 사랑은 아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를 알고, 그 관계에서의 적절한 거리를 찾는 일이다.

가까이 있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상대가 숨 쉴 공간을 남겨두는 것. 그 공간 안에서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사랑은 거리와 공간이 지켜질 때 오래간다.

시바견의 도도한 뒷모습을 떠올린다. 언젠가 내가 반려인이 된다면, 그 거리를 지킬 수 있을까. 내 외로움보다 그 아이의 본성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안다. 진짜 사랑은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것이 누구든, 무엇이든.


거리를 둔다는 건 냉정함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일이다.
사랑은 가까워질수록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가까움 속에서는 자기 방식의 사랑이 타인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내가 다가가고 싶은 만큼’이 아니라 ‘상대가 숨 쉴 만큼’의 거리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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