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후회 없이 노력할 수 있도록
도서관에서의 고요한 시간은 잠시였다. 책을 덮고 돌아오는 길,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변했다.
여름이 깊어가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멀어지고,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알림이 떴다. 그 한 줄의 문장은, 도서관의 고요에서 현실로 돌아오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버지의 자리로 돌아왔다.
"2학년 1학기 성적이 공개되었습니다."
무심코 화면을 열었다가, 숫자들을 보는 순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딸아이는 늘 말했다. "인서울 대학 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 말만큼의 노력이 따라오고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늦은 밤까지 휴대폰을 보며 웃는 모습은 익숙했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그게 자연스러워진 게 문제였다.
성적표를 보고 난 뒤, 며칠 동안 그 숫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잔소리는 하기 싫었고,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방학이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담임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학부모입니다. 진로 및 성적 관련 상담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편하신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시면 일정 맞춰 찾아뵙겠습니다."
반나절이 지난 후 답장이 왔다.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답장을 늦게 드려 죄송합니다. 현재 시험 출제 기간이라, 일과 시간은 어렵습니다.
혹시 4시 30분 이후로도 가능하실까요? 15, 16, 17일 4시 30분 이후에 상담 가능합니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럼 9월 17일(수) 오후 5시로 상담 신청합니다. 주요 과목별 학습 상황과 성적 관리 방향, 대학과 전공 등 진로 선택 조언, 생활 습관이나 공부 태도에서 보완할 점에 대해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답장.
"네, 어머니. 보내주신 내용 확인하였습니다. 9월 17일(수) 오후 5시, 2학년 교무실에서 뵙겠습니다.
상담 이전에 아이와도 상담 진행하고 관련 내용을 정리해두겠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문자를 읽고 나서 생각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처음 하는 상담이었다.
1학년 때도, 2학년 올라올 때도 한 번도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
그냥 아이가 알아서 하겠거니, 했다.
이번엔 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학교에 도착해 2학년 교무실을 찾았다. 2층과 3층 사이, 운동장 뒷편에 위치한 곳이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무실 문을 열자 선생님이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딸아이가 말하길, 담임선생님은 학교에 부임한 지 2년 차인 젊은 여자 선생님이라고 했다. 담당 과목은 물리. 아이가 가장 어려워했던 과목이었다.
"아, 아버님이시네요. 어머님이 상담 신청하신 줄 알았는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네. 제가 시간이 되서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료 좀 출력하고 올게요."
선생님은 프린터 쪽으로 가고, 나는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2학년 교무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책상 위엔 시험지와 자료들이 쌓여 있었고, 벽면에는 학급 사진들과 학사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아이가 매일 이곳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구나. 이런 공간 속에서.
잠시 후 선생님이 자료를 들고 왔다.
그리고 정수기에서 물 한 컵을 받아 내 앞에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찾아오시게 되었어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이가 목표가 있는데, 나이스 정보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알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조언을 듣고, 앞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말씀 듣고자 직접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사실 직접 찾아오시는 학부모님들이 많지 않으신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출력한 자료를 펼치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아이와 먼저 상담을 했어요. 꽤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고요."
"충격이요?"
"본인은 성적이 떨어진 건 아닌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생각보다 현실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점수가 주는 현실감은 때때로 잔인하다.
"그래도 긍정적인 건, 아이가 다짐을 했어요. 공부하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요."
선생님은 자료를 보며 이어서 말했다.
"사실 1학년 때를 보면, 1학기에서 2학기로 넘어갈 때 성적이 꽤 상승했거든요. 그래서 공부 방법은 알고 있을 거라고 봐요. 다만 꾸준히 실천하는 게 어렵고, 집중력이 일정하지 않은 편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지속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수학은 개념은 잘 잡혀 있지만 응용 문제 풀이 연습이 부족하고요, 특히 물리를 많이 어려워하더라고요. 국어는 지문 독해 속도를 높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영어는 단어 암기량만 늘리면 충분히 점수 상승이 가능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집에서 문제집을 펼쳐놓고 한숨 쉬던 아이 모습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는데, 막상 책을 펼치면 오래 가지 않았다.
"아이가 과목 선생님들에게 직접 찾아가 상담해보면 좋겠어요. 담임보다 각 과목 선생님들이 구체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거든요."
사실 나도 안다. 요즘은 과목 선생님께 직접 찾아가 묻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요즘은 분위기가 바뀌어서 좀 편하게 선생님께 상담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긴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은 준비해둔 자료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현재 수준을 기준으로 보면, 본인이 목표로 하는 대학은 다소 높은 편이에요. 하지만 남은 기간 동안 성적을 끌어올린다면 충분히 가능성을 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아요. 지금부터의 집중력이 성적보다 더 중요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이어서 진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는 진로 방향을 아직 고민 중이에요. 전공 선택도 흥미라기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조금 더 커 보였어요. 그래서 지금 시기엔 '무엇을 하고 싶은가'보다 '무엇을 꾸준히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찾는 게 필요합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공부의 방법보다 더 중요한 건, 방향을 잃지 않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보셨을 때, 지금 시점에서 남은 기간 동안 성적이 올라 원하는 대학에 간 학생이 있었나요?"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솔직하게 답했다.
"제가 학교에 부임한 지 오래되진 않았어요. 그래도 작년에 맡았던 학생 중 한 명은 한 학기 만에 성적이 꽤 올랐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습 능력은 중학교 때 이미 어느 정도 자리 잡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고등학교에서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선생님은 말을 잠시 고르고 덧붙였다.
"공부 방법은 알고 있으니 결국 공부량이 문제입니다. 모르는 부분은 과목 선생님께 적극적으로 묻거나… 조금 조심스럽지만, 사교육의 도움을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부터 남은 시험과 수행평가를 잘 치르면, 가능성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1학년 때 올렸던 것처럼, 꾸준히만 하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어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막연한 불안이 조금 정리됐다. 결국 문제는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부터 하느냐'였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학교생활에 대해서도 짚어주었다.
"친한 친구 한 명과 잘 지내고 있고, 발표는 조용한 편이지만 맡은 일은 성실히 합니다. 자기표현이 조금 약하지만 예의가 바르고, 또래 관계도 원만합니다."
그 말을 듣고 조금 안심이 됐다. 성적보다 더 중요한 건, 학교에서의 균형감과 관계 속의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0여 분의 상담을 마치고 교무실을 나섰다.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고, 발소리만 울렸다. 머릿속에선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문장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선생님의 말들이 천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성적은 올릴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건 지금부터의 집중력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
나는 잠시 복도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교정은 한산했고, 바람만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문득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모습. 무표정하지만 단단한 눈빛.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 말은 아이에게도 필요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더 필요한 말일지도 몰랐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오늘 저녁, 아이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다그치지 않되, 외면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저녁 무렵, 딸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왔다. 거실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는 아이에게 말을 꺼냈다.
"오늘 선생님 만나고 왔어."
"아, 그래? 뭐라고 하시던데?"
아이는 편하게 물었다. 우리 집은 원래 이런 식이다. 긴장하거나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서로 솔직하게, 때로는 부딪히기도 한다.
"네가 목표로 하는 대학, 가능하대. 근데 지금처럼 하면 어렵대."
"그치. 나도 알아."
아이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나 생각해봤는데, 수시보다는 정시로 가야 할 것 같아."
"정시?"
"응. 내신은 이미 좀 어렵잖아. 근데 수능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정시로는 가능성 있지 않아?"
아이는 나름의 논리를 세운 듯했다. 하지만 그 '논리'가 자칫 요령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말했다.
"그런 식으로 조건부터 세우면, 결국 둘 다 놓칠 수도 있어."
"왜?"
"내신 관리 못 한 사람이 수능은 잘 본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수시, 정시 이런 걸 나누기 전에, 지금은 공부 자체에 집중해야 해."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문득 생각나서 말을 꺼냈다.
"아,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좀 부족한 과목은 교과 담당 선생님께 상담해보라고."
딸아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우리 반에서도 선생님 찾아가서 물어보는 애 거의 없어."
나는 웃으면서도 씁쓸했다.
"그래? 요즘은 그런 게 더 어렵구나."
"응. 그냥... 선생님이랑 온도가 달라. 괜히 유난 떠는 애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예전이나 지금이나 학교 선생님은 사교육 선생님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배움의 현장은 변했지만,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거리감은 여전히 그대로인 듯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네가 공부를 안 하면,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해. 아빠는 강요 안 할 거야. 근데 지금 분명 목표가 있고, 아직 시간이 있잖아. 그러면 노력을 해봐야지. 노력도 안해보고 이렇게 시간만 보내면 많이 후회할거 같아서. 아빠가 옆에서 도와줄게."
딸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해볼게."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냥 상황을 모면하려는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믿는 게 필요했다.
아이가 잠든 뒤, 나는 거실 불을 끄고 창가에 앉았다.
그날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가 정말 변할까?'
확신은 없었다.
습관이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며칠 지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방향은 잡았다.
내 욕심이 아니라, 아이가 후회 없이 노력할 수 있게 옆에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함께 앉아서 현실을 보는 일뿐이다.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그저 곁에서 바라봐주는 것.
방학 동안엔 매주 일요일마다 딸과 함께 국립세종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한켠에서 마주 보고 앉아 책을 읽고, 잠시 커피를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개학 후엔 마음이 달라졌는지, 이제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겠다고 했다.
조금은 서운했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거창한 주제가 아니어도 좋다.
그냥 오늘 하루 어땠는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이가 한화이글스 팬이라, 대화의 시작은 대부분 야구 이야기로 풀리곤 한다.)
여름이 지나고, 나는 교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빠로서의 나도 조금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무실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삶은 결국,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돌아보는 시간의 연속이라는 걸.
딸의 성적표도, 나의 조바심도 언젠가는 지나갈 하나의 기억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남는 건 점수가 아니라, 그때의 표정과 공기의 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