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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etters of Us

사랑의 실존적 여정

시선에서 침묵으로, 그리고 돌봄으로

by Jwook

나의 학창시절엔 시집이 유난히 인기 있었다. 누군가는 소설을, 누군가는 잡지를 들고 다녔지만 그 시절 서점 한켠에는 언제나 시집이 쌓여 있었다.


편지지 위에 시 한 줄을 베껴 적어 건네던 시절, 감정을 글로 전하는 일이 곧 사랑의 표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감정을 언어로 나누던 아름다운 낭만의 시대였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 원태연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라 간직함이라더니, 거봐 너도 울잖아.” — 이풀잎
학창시절에 사서 읽었던 시집 한 권,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 두 문장은 내 젊은 날의 감정을 정확히 말해준다.


사랑은 덜어내면서 채워지는 역설이었고, 이별은 잃음이 아니라 간직함이었다.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내 온도를 확인하며, 그 시선이 내 존재를 증명해주던 시절 — 그것이 내 젊은 날의 사랑이자 철학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사랑의 모양은 달라졌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증명하던 시절이 지나고, 그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제는 나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뜨거운 시선의 언어에서 침묵의 언어로, 그리고 마침내 돌봄의 언어로 옮겨가는 이 여정은,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존의 성장 과정임을 일깨워준다.


시선의 사랑 — 타인의 눈 속에서 존재하기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시선이었다. 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세상이 또렷해지고, 그 눈빛 하나에 하루의 의미가 달라졌다. 그때 사랑은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존재하게 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세계 속에서 ‘보여지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그 시선이 나를 증명하고, 결핍을 채워준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나의 자유로운 의식은 하나의 대상으로 굳어진다. 사르트르가 인간을 대자(for-itself)라 부른 이유다. 사랑은 이 자유와 구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서로의 자유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기에, 사르트르는 사랑을 ‘헛된 열정(passion inutile)’이라 불렀다.


붙잡으려는 순간 멀어지고, 가까워질수록 사라지는 — 사랑은 그 불가능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나아가려는
가장 인간적인 모험이었다.


침묵의 권태 — 시선이 거둬질 때


그러나 시선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시간이 쌓이면 눈빛은 대화보다 습관이 되고, 손끝의 온도는 일상의 공기에 섞여 희미해진다.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감각의 방식이 변한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거둬지자 우리는 침묵과 마주한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는 이 침묵의 무게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러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존재’가 아닌 ‘익숙함’으로 대한다. 상대의 자유를 바라보던 시선은 무뎌지고, 관계는 유지되지만 실존적 만남은 멈춘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익숙한 가구처럼 곁에 두고 있을 뿐인가. 이 침묵의 순간은 사랑이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고요이자 통과의례다.


돌봄의 성숙 — 하이데거의 거주와 사랑의 의지


이 침묵의 지점에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본질을 ‘염려(Sorge)’라 했고, 후기 저작 『건축, 거주, 사유』에서 말했다.

“인간은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


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염려하고 돌보는 태도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공동-존재(Mitsein)’, 즉 함께 거주하는 존재다.


〈가구〉 속 부부는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서로의 삶 안에 진정으로 ‘거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돌봄의 행위를 멈춘 채, 서로를 사물처럼 곁에 두었다.


사랑은 결국, 상대의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고요를 함께 견디는 일이다. 상대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 주는 하이데거적 ‘임재(Presence)’, 그것이 성숙한 사랑의 얼굴이다.


매일의 사랑 — 다시 존재로 마주하기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랑을 느끼는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젊을 땐 타인의 눈빛 속에서 나를 확인했지만, 이제는 침묵과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묻는다. 그 자리에 남는 건, 상대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하루하루의 작은 결심이다.


사랑은 더 이상 폭발적인 감정이 아니라, 조용한 실천이다. 오늘의 인사, 사소한 대화, 그 평범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배운다.


사르트르의 시선에서 시작된 사랑은 하이데거의 거주로 성숙한다. 뜨거운 눈빛이 식었다고 해서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랑은 얕은 곳에서 증발하지 않는다.


단지, 더 깊은 곳으로 거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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