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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Dec 13. 2024

사소하지 않았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여백이 때론 많은 글보다 강하다는 거

얼마 전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란 책을 읽었다. 그동안 400page가 넘는 고전만 읽다가 얇은 소설이라 좋았고,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술술 읽혀 그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돌진했다. 솔직히 내용이 특별하지도 않고 사촌 집에 맡겨진 소녀의 일상과 심리상태를 담담히 그려 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뭉클하고 책장을 덮은 뒤에도 여운에 사로 잡혔다.  


독서모임에서도 다들 비슷한 의견이었다. 소소한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울릴 수가 있는지. 분명 짧은 문장인데 어떻게 그 안에 단어하나 빠질 것 없이 꽉 들어찰 수 있는지. 읽을 때 보다 읽고 난 후가 계속 남는 신비로운 소설이었다. 어느 순간 잊고 있던 맡겨졌던 경험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알고 보니 대단한 소설가였는데 독서모임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클레어 키건의 또 다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었다. 호기심만 갖고 있던 중 인스타 지인이 댓글로 기대평을 남기면 추첨해서 시사회 티켓을 준다고 했다. 독서모임을 통해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하고 느낀 감흥을 신경 써서 적어 보았다. 두 근 반, 세 근 반 기다리는데 얼마 뒤 당첨되었다는 DM을 받았다. 어찌나 기쁘던지. 표가 2장이라 아내에게 연락했더니 좋다고 했다.


시사회 장소가 용산 CGV라 조금 일찍 퇴근해서 아내를 만나 인근에서 맛난 저녁을 먹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넓은 홀에 긴 줄로 이어진 인파를 보고선 본능적으로 그 뒤에 섰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표를 받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작부터 울퉁불퉁한 장면이 이어져 살짝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내 등장한 주인공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차를 몰고 석탄을 배달한 후 집에 돌아와 더러워진 몸을 씻고 가족들과 식사하며 시간을 보낸다. 잠자리에 든 후 새벽쯤 깬 머피는 거실에 나와 의자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무언가 모를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 그리곤 아침에 되어 옷을 챙겨 입고 차를 타고 석탄 회사로 출근한다.


초반에 위와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대사는 머피가 가족들과 있을 때 잠깐 나오고 대부분 행동으로만 가득 찼다. 마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머피의 어린 시절 일화가 등장하는데 별다른 설명도 없어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 클레어 키건이 여백을 주는 이유는 그 빈 공간을 독자가 채워주길 바라서라는 걸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영화 역시도 같은 맥락 같았다. 가끔 궁금한 점은 아내와 귓속말로 나눴다.


수녀원에 배달하러 간 빌 펄롱은 석탄 창고 안에 갇힌 한 소녀를 만난다. 그리고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들.  이후 빌 펄롱은 깊은 고뇌에 빠져드는다. 어느 순간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듯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괴로웠다. 작가의 글이 화면에 담기고, 배우가 그걸 완벽하게 소화하니 관객은 몰입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금세 흘렀고, 영화가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와 아내는 잠시 머물다 일어났다. 뭉클한 무언가가 가슴에 훅 들어와 나갈 줄 몰랐다. 영화처럼 우리도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클레어 키건이란 작가는 마음의 글을 쓰는 분이 아닐까. 쓸데없는 말들이 난무한 세상에 꼭 필요한 말만 글로 옮기고, 여백을 통해 우리의 생각으로 채워주게 만드니 마음이 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깊고 무서운 진실을 말하라. 자기가 느낀 바를 표현하는 데 있어 절대 주저하지 마라. 깨닫기만 하고 실천을 안 하면 깨달음이 아무 소용없다"란 힐티의 말이 떠오르는 좋은 영화였다. 영화를 재미로서 좋아하지만, 영화가 영화다운 건 역시 묵직한 메시지가 관객에게 닿을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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