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인 뉴욕

연말 맞이 2025년 <다시, 뉴욕>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

by 성급한뭉클쟁이

현재 시각 오전 6시 19분,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이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찍 깨버렸다. 오래간만에 오르는 귀국길에 설레는 마음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얼마 전 아파트 관리실에서 "업그레이드" 해준 라디에이터 배관 마찰 소음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그저 고요한 아침 시간을 즐기는 나의 성향 탓일 수도 있겠다. 한참 전에 눈이 떠져서 다시 취침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해보았으나 모두 대차게 실패하고 커피를 내리고 결국 노트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메일도 다음 달 발표 자료 준비도 아닌 이번 <다시, 뉴욕>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항공권 구매를 알아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 비성수기와 성수기를 나누는 기준은 크리스마스 전후가 아닌 꼭 크리스마스 당일이라고 한다. 12월 24일에 출발해서 크리스마스 당일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보내게 되는 일정 자체가 값 비싼 특권이라는 의미다. 그에 반해 12월 25일 새벽에 출발해서 크리스마스 익일 새벽 6시 반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즉 크리스마스 하루를 몽땅 날려버리는 비행 일정은 훨씬 저렴한 비성수기 시즌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장황하게 크리스마스 시즌 비행기 편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맞다. 바로 내가 오늘 (12월 24일)이 지난 12월 25일 자정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기 때문이다.


약 10개월 만의 한국 방문이다. 지난 3월에 도착해서 정신없는 포닥 첫 1년을 보내던 중이었는데 차분하게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에 꼭 볼 사람이 생겨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뉴욕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라는,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게 되어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위해 진정한 연말은 한국에서 보내고, 뉴욕에서는 12월의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기로 했다.


지난달 말 추수감사절이 끝나자마자 뉴욕의 도심 속은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가득 채워졌다. 가을 시즌의 호박 장식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도시는 그야말로 "크리스마스"를 알릴 수 있는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먼저 거리를 활보하는 (또는 인력거를 운전하는) 산타할아버지가 많이 보였다. 특히 퍼레이드를 하거나 시내 펍에서 코스프레 파티를 앞둔 날에는 산타할아버지부터 크리스마스트리, 루돌프 등 테마에 맞춰 분장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외에도 센트럴 파크에서 마차를 몰거나 인력거 투어를 운영하는 라이더들 대부분 산타 복장을 하고 캐럴을 틀며 거리를 활주 했다. 그리고 이들 뒤로 시내 상점들 간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 경진 대회가 시작됐다. 고급 명품관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나 동네 서점, 카페 등 모든 곳에 트리, 리스, 전등 또는 글라스 타일 같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비치되었다. 특히나 명품관들마다 자신들의 상품을 오너먼트 (ornament, 장신구) 삼아 외부 및 내부 디자인을 완성했는데 개성 넘치는 공간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뿐만 아니라 판매되는 아이템 진열대 역시 변화가 있었는데 봄 향기 가득 꽃이 가득 담긴 플로럴 패턴이나 화창한 색감의 여름 패브릭, 또는 가을을 떠 올리게 하는 푸근한 웜톤의 스웨이드 재질이 아닌 누가 봐도 크리스마스를 떠올릴만한 패턴의 접시와 머그잔, 빨간색 그리고 초록색이 보기 좋게 섞인 목도리 등이 상점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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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스퀘어를 가득 채운 산타 할아버지. 붉은색 표범 장식이 인상 깊은 까르띠에 매장 앞 산타 라이더의 모습이 재밌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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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오너먼트부터 아는 친구들 다 모아서 크리스마스 홈파티 하고 싶어지는 그릇들, 그리고 <나 홀로 집에>의 케빈 맥캘리스터 그림이 그려진 귀여운 빈티지 티셔츠

이러한 도심 속 장신구들은 대륙의 스케일, 그중에서도 뉴욕의 스케일을 뽐내며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는데 인상 깊은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백화점 간의 경쟁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미디어 파사드"라는 명칭으로 황홀한 크리스마스 조명 장식을 구경할 수 있는데 뉴욕에서는 오랜 전통을 느낄 수 있는, 정말이지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는 백화점 외부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먼저 백 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추수감사절 퍼레이드의 주최자인 Macy's 백화점의 외관 역시 예쁜 조명과 트리들로 가득했다. 두 번째는 쇼핑의 메카, 5번가 (에비뉴)의 Saks Fifth Avenue인데 매년 색다른 크리스마스 조명 쇼를 관람할 수 있다. 보아하니 매년 디자인을 총괄하는 브랜드가 바뀌는 듯한데 2023년에는 크리스찬 디올이었고 올해는 또 다른 디자이너가 이를 맡은 것 같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다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뉴욕의 "그 크리스마스트리"가 자리 잡고 있는 록펠러 플라자의 바로 뒤편이라 엄. 청. 난 인파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IMG_4779.JPG Macy's 백화점의 넘치는 존재감. 내부 인테리어도 더 구경할 걸 그랬지만 인파가 너무 많아서 아주 쉽게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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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Saks Fifth Avenue의 라이트 쇼 장식과 (2023년, 왼쪽) 올해 라이트 쇼 장식 (2025년, 오른쪽). 개인적으로 재작년 시계탑 스러운 장식이 더 멋있었다.

당최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은 록펠러 플라자는 <나 홀로 집에 2>의 배경이 되었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워낙 상징적인 곳이라 올해는 어떤 상록수가 조달되는지, 어느 고속도로를 타고 언제 도착하는지, 공개와 더불어 장신구 조명이 켜지는 날짜까지 전국권 뉴스 (national news)에 보도되는 정도다. 나 역시 하루는 매디슨 스퀘어 공원의 북쪽 동네인 Nomad (North of Madison Square Park)에서 친구를 만나고 귀가하던 중 문득 록펠러 크리스마스트리가 생각이 났다. 살짝 무리해서 내 눈에도 나무의 모습을 담고 귀가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중간 지점인 브라이언트 공원 (Bryant Park)부터 슬슬 고비가 찾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서 공원의 크리스마스 마켓의 볼거리와 놀거리, 그리고 먹거리를 즐기고 있었고 이 때문에 5,6번가 모두 마비가 될 정도로 인산인해 했다. 어렵게 50번가에 도착했으나 뉴욕 경찰들이 설치해 둔 울타리 사이로 사람들이 움직여야 해서 이동이 어려웠고 정말 고생해서 잠깐 눈에 담은 모습은 경이롭다기보다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만약 케빈이 엄마를 잃어버리고 록펠러 광장을,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찾는다면.. 안타깝지만 엄마와의 재회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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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공개 전까지는 그 모습을 숨기려고 노력하다가 첫 번째로는 나무를 공개하고, 두 번째로는 장신구에 불을 붙이는 행사를 한다. 그 날은 절대 이 동네를 지나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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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예쁘긴 하니까 눈에 담고 카메라에도 담았다. 2018년부터 뉴욕에 다녀간적은 많았지만 크리스마스 트리의 실제 모습을 본건 올해가 처음이었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는데 추운 날씨에 달콤한 핫초코를 즐길 수도 있고, 쇼핑할 상점도 많을 뿐만 아니라 광장 중심에는 아이스 링크까지 설치되어 있어 "겨울"과 "연말"을 즐기기에 제격인 동네인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바로 옆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매년 연말마다 전통 크리스마스 공연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댄스팀 로케츠 (Rockettes)의 무대를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유독 12월이 되면 인파가 몰리는 것 같다. 언젠가 뉴욕을 떠나기 전에 꼭 보고 싶은 공연이긴 하지만 록펠러 플라자 앞에서 마주한 인파에 기가 빨려서인지.. 더 이상 크리스마스 당일을 뉴욕에서 보낼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아쉬움이 깔끔히 사라진 하루였다.


백화점 크리스마스 장식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바로 첼시 하이라인의 북쪽 상단에 위치한 허드슨 야드 (Hudson Yard)다. 이곳은 2023년 가을에도 방문한 적이 있고, 올해 초 뉴욕에 와서 "The Edge" 전망대에 다녀온 적도 있는 마천루이자 쇼핑몰, 즉 백화점 건물인데 입구에 위치한 베슬 (Vessle)의 화려한 장식과 열기구, 그리고 내부로 이어지는 열기구 장식이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그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았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금빛 장식이 유독 베슬의 화려한 구조와 어울리는 것 같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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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야드 앞 베슬의 장식. 금색 빛깔 크리스마스 장식이 유독 아름다웠다.
IMG_4733.JPG 실내까지 이어지는 열기구 장식은 덤!

규모로 승부를 보는 백화점의 자본력 외에도 도심 곳곳에서 구경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의 대표 주자는 바로 "트리"다. 한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를 집 안에 들여놓아 추위와 악령을 막고 봄을 기원한다는 풍습에서 유래된 크리스마스트리는 가정집뿐만 아니라 도심 속 구석구석 커다란 규모를 뽐내며 저마다 뉴욕의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가장 먼저 소개한 록펠러 플라자의 나무가 있지만 그 외에도 꼭 소개하고 싶은 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첫 번째는 뉴욕 시립 도서관 내부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다.


생일 당일에도 열람실을 찾을 만큼 좋아하고 자주 찾는 공간인 뉴욕 시립 도서관은 지점이 많지만 가장 큰 "본점(?)"은 바로 브라이언트 파크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연말 시즌을 맞아 선물 쇼핑도 해야 해서 기프트샵을 방문할 겸 도서관에 들렸는데 시원하게 층고가 높은 입구 인테리어 장식과 크리스마스트리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날아오르는 새 모양이 많았던 오너먼트가 기억에 남는데 유명한 캐럴에 나오는 도도새인지, 평화를 뜻하는 흰 비둘기인지, 또는 밤을 상징하는 올빼미인지는 다소 헷갈렸지만 특히 옆에 놓인 촛불과 유독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다고 느껴졌다. 도서관 방문의 주목적이었던 기프트샵에도 연말 분위기가 물씬 들어있었는데 뉴욕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담은 카드와 엽서, 달력과 퍼즐, 그리고 장식용 포스터까지..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머그잔 하나로 마음을 달래며 재빨리 기프트샵을 벗어났다. 도서관 밖에는 시립 도서관을 상징하는 사자 동상이 크리스마스 리스를 두르고 있었는데 목도리를 두른 것처럼 포근해 보여서 나도 더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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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실과 더불어 여전히 고딕하고 해리포터 기숙사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뉴욕 시립 미술관. 실내 장식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규모가 큰 트리라 구경하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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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고 싶었던 NYPL 크리스마스 카드 세트와 크리스마스 리스로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도서관의 마스코트 사자 선생님.

도서관에서 트리 구경을 하고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크리스마스트리 "도장 깨기(?)"를 이어가 보기로 했다. 다음 주자는 바로 맨해튼 남부 (Lower Manhattan) 월가의 뉴욕 증권거래소 앞의 대형 트리다. 타임 스퀘어 근처 미드타운에 밀려 비교적 관심을 덜 받고 있는 이번 나무는 오히려 그래서 더 예쁘고 구경하기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부러 퇴근하고 평일에 찾아갔는데 그래서인지 인파도 비교적 덜 붐볐고 사진 찍으며 아름다운 자태의 크리스마스트리를 눈에 담기도 딱 좋은 곳이었다. 괜히 증권거래소 앞이라 그런지 다가올 내년 재물운도 한껏 받아가는 느낌마저 들었던 곳이다. 미국 성조기와 주변 명품관들의 장식이 월가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웅장함을 더해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건물 기둥에 테마 색깔에 맞추어 조명을 설치한 모습도 예쁘고 말이다.

IMG_5495.JPG 월가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서 바라본 크리스마스트리
IMG_5515.JPG 내년에는 (포닥이지만)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계약직 말고 좋은 일자리 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크리스마스트리의 규모에 있어서는 뉴욕의 고급 호텔들도 절대 밀릴 수가 없다. 특히 이 도시의 5성급 호텔의 자본력은 가늠하기도 어려운 수준인데 최근에는 네트워킹 행사 덕분에 다녀온 롯데 플라자호텔이 딱 좋은 예시가 되어주었다. 당일 새벽부터 오전 내내 눈이 많이 온 덕분에 온 세상이 하얗게 환골탈태한 날이었는데 그 덕분에 인조 눈이 아닌 실제 눈이 쌓인 트리를 볼 수 있었던 날이다. 낮과 밤 모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트리가 있어서 그런지 사실 호텔 로비와 정원은 꼭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투숙객이 아니어도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그 들의 마음이 단번에 이해 갈 만큼 훌륭한 인테리어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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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온날이라 더 멋스러웠던 플라자 호텔 로비 앞 크리스마스 트리. 록펠러보다 훨씬 한산하고 뉴욕 5성급 호텔의 자본력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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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서 본 크리스마스 장식 모습도 정말 낭만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대규모의 트리 장식 외에도 가정집에서 꾸미는 크리스마스 트리에도 미국 사람들은 정말 진심이구나 하고 느꼈던 것이 12월이 되자마자 큰 마트뿐만 아니라 동네 상점이나 길거리에서 트리 마켓이 곳곳에 열렸다. 게다가 트리 모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살이 있던) 상록수를 크기별로 베어 판매하고 있었는데 정원이 있는 집에 살고 있다면 꼭 내 집 앞에 마련하고 싶은 장식품 중 하나다. 나 역시 크리스마스 트리에 대한 오랜 로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5년 전 대학원생 시절 첫 자취를 시작했던 첫겨울 곧바로 트리를 장만했는데 아마 진짜 내 집이 생겨도 비슷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개성 넘치는 오너먼트를 곳곳에서 하나씩 사 모으는 재미도 대단할 것 같다.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의미 있는 일상생활이나 또 여행 중 하나씩 장만한 장신구들을 시즌마다 트리에 달고 조명까지 키면 곧바로 서로를 위한 성탄절 선물을 사서 포장하고, 다음날 따뜻한 핫초코와 진저 브레드 쿠키를 먹으며 뜯어보고 싶은 상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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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곳곳 열린 크리스마스 트리 마켓. 집이 컸으면 나도 한 그루 업어왔으려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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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취향에 맞게 사 모으고 싶었던 트리 오너먼트 모음집. 예쁘게 꾸민 나만의 트리로 그림을 그려 크리스마스 카드를 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뉴욕 곳곳에서 크리스마스트리 구경을 실컷 했는데 눈호강을 마쳤으니 그다음은 바로 먹거리다. 크리스마스니까 꼭 먹어야 해! 싶은 메뉴는 없지만 그래도 그 따뜻함을 나누고 달콤한 연말을 위해 나눠 먹는 디저트가 유독 풍성한 것 같다. 먼저 내가 속한 컬럼비아 대학에서도 심심치 않게 행사를 주최해 줬는데 먼저 겨울 시즌을 맞이하여 핫초코와 애플 사이다 도넛을 나눠먹었다. 애플 사이다 도넛은 특히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가을부터 연말에 즐기는 시즈널 디저트인데 사과즙을 졸여 반죽에 넣은 도넛을 가리킨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도넛을 따뜻하고 달콤한 핫초코와 마시면 아주 금상첨화의 조합이 되어주는데 차가운 바람에 얼어버린 몸을 녹이기에도 제격인 디저트다. 그 외에도 연말 시즌을 축하하기 위해 랩미팅 전 간단한 도넛 파티도 했고, 12월 중순부터는 학과별, 그리고 연구실 별로 수많은 연말 파티가 열렸다. 모두가 조금씩 음식을 가져와 나눠 먹는 팟럭 (Potluck) 스타일일 수도 있고, 함께 좋아하는 메뉴를 배달시켜 먹으며 선물을 나눠 갖는 시크릿 산타 (Secret Santa, 우리나라 마니토 개념과 비슷하다.) 또는 화이트 엘리펀트 (White Elephant, 불필요한 선물을 사서 랜덤으로 나눠 갖는 이벤트다.) 게임을 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지도교수님 두 분을 모시고 포닥으로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는 스트레스도 두 배일 수 있지만 연말 파티도 두 배인 덕분에(?) 12월 내내 배부른 (그래서 안타깝게도 볼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덕분에 식비도 줄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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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도파민이 폭발했던 컬럼비아 대학 메디컬 센터 라이팅 이벤트. 와중에 출출했던 수많은 대학원생과 포닥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당충전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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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일주일 정도 점심 도시락 메뉴 고민을 안하게 도와주었던 학과 및 랩 크리스마스/송년 파티. 교수님과 함께하는 합법적(?) 낮술 타임이었다.

이와 같은 학교 행사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겨울의 따스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겨울 음료 마시기다. 커피도 에스프레소보다는 드립을 좋아하는 나는 이번 시즌 스타벅스 2025년 크리스마스 블렌드 원두를 사서 12월 내내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 마셨다. 눈을 뜨자마자 커피 포트에 물을 끓여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건 무더운 여름에는 즐기기 어려운 감성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선물 받은 말차 격불 세트와 우유 거품기를 활용하여 말차 라테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는데 솔직히 뉴욕의 여느 카페에서 사 마시는 것과 견줄만한 맛이었다. 예상 판매가는 세금과 팁 포함 7불 정도 할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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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는 나는 성탄절 시즌을 맞이하여 크리스마스 블렌드 원두를 구매했다. 말차 라테는 좀 더 연습하면 동네 친구에게 간식과 함께 대접하려고한다.

물론 새로운 공간에서 일상을 곱씹는 걸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에게 "카페 타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귀국 선물 용 원두를 사기 위해 브라이언트 공원 옆 La Colombe 매장을 들렸는데 따뜻한 드립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책도 읽고 다이어리도 쓰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카페 타임 역시 매우 소중한데 시즌에 맞게 스파이시한 차이 라테와 카다몬 번이 생각났던 주말에는 소호의 La Cabra 매장에서 빵과 수다 타임을 가졌다. 지난번 글에서도 소개했지만 카다몬 번은 올해 뉴욕에 와서, 그리고 스톡홀름에 놀러 갔을 때 처음 알게 된 맛인데 새롭게 나의 취향으로서 자리 잡은 맛이자 페이스트리 메뉴라고 생각한다.

IMG_4995.JPG La Colombe는 라테가 진국이라고 하지만 난 그저 따뜻한 드립커피가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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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한 향신료 음료와 디저트를 유독 잘하는 La Cabra의 대표 메뉴들 - 카다몬 라테, 차이 라테, 그리고 카다몬 번. 연말 시즌과 어울리는 메뉴 선택이었다.

드립커피도 좋고, 말차 라테도 좋고 차이 라테도 좋지만 연말인 만큼 또 약간의(?) 알코올도 필요한 것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술을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과거형으로 답하고 제일 좋아하는 주종을 묻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와인"이라고 답하는데 한 번 열면 다 마셔버려야 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날 와인을 마시기 위해 마련했을 고즈넉한 분위기와 페어링 음식, 그리고 평소보다는 조금 더 신경 썼을 나와 동행자의 노력이 예뻐서다. 그리고 술이 약해진 나에게 페이스 조절을 위해서는 와인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끝내주는 향을 느껴보라고 주변에서 위스키를 권해봐도 아직은 그 진가를 느껴본 적이 없고, 막걸리는 배부르고, 소주는 너무 쓰기만 하다. 물론 생맥주는 좋아하지만, 아무튼 연말에는 와인만 한 주종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 연말 시즌 역시 와인 파티를 즐기기 위해 친구와 시간을 잡았다. 뉴욕에는 수많은 펍과 와인바가 있겠으나 가성비와 분위기를 위해 엠파이어스테이트 (Empire State Building) 뷰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친구네 집에서 DIY (Do-It-Yourself) 와인 상을 차려보기로 했다. 먼저 취향에 맞게 샤퀴테리 & 치즈 보드를 만들어 주는 Spitfire Cheese & Sundry 카페에서 만나 주문을 넣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1차 수다를 시작했다. 완성된 치즈 보드를 받아 친구네 집 근처 이탈리언 베이커리인 Sullivan Street Bakery에서 피스타치로 크루아상과 바게트를 구매했다. 친구네 도착 전 마지막 행선지는 바로 Veritas Studio Wines 와인샵이었다. 대중적인 와인 리스트보다는 비교적 틈새시장 (niche)에서 공수해 온 와인을 정성스레 추천해 준다는 친구의 후기를 듣고 찾아간 곳이었다. "연말"하면 입맛을 다시게 되는 레드 와인 중 단 맛과 탄닌산미가 덜한 와인을 추천받았는데 피노 네로 (Pinot Nero)의 한 종류였다. 굉장히 고급진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직접 구매해서 마시면 $40 정도에 맛을 볼 수 있는 반면 만약 와인바나 레스토랑에서 페어링 와인을 주문하면 가격은 곧바로 잔당 $15-20을 넘나들게 된다. 둘이서 한 병을 비울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홈파티가 훨씬 더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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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해도 설레는 사퀴테리 & 치즈 보드 제작과정. 주문 즉시 구성에 맞게 포장해주시는데 고즈넉한 매장 분위기를 즐기며 10분 정도 기다리면 바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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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틱토커들이 줄 서있는 빵집이 아닌, 정말 동네 빵 맛집에서 바게트 빵을 사고 피노 네로 와인을 한 병 사서 친구네 집에 도착했다.

결과는 너무너무너무 맛있었다. 마침 선물 받은 샤퀴테리 보드가 있던 친구는 플레이팅을 시작했고 나 역시 치즈 보드 포장을 뜯어 치즈와 과일, 견과류와 크래커 조각들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구매했다는 와인잔은 너무나도 취향저격이었고 6시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짧고 굵은 수다이자 대화를 이어갔다. 이번 연말 꼭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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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더 예쁘게 먹고 싶은 마음에 치즈 보드에 한 번 더 플레이팅을 했다. MoMA에서 샀다고 알려준 와인잔은 귀국 전 꼭 사고 싶은 아이템이 되었다.

야외 활동을 아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겨울 뉴욕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꼭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었는데 바로 아이스 스케이팅이다. 나에게 거의 유일무이한 기억이 있다면 바로 초등학교 시절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탔던 아이스 스케이트의 추억이다. 당시 꽤나 먼 길을 떠나 가족과 함께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던 기억이 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입장권은 천 원 남짓했던 것 같다. 평소에도 근처 공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겨 탔던 나와 언니를 위해 부모님께서 데려가주신 건데 손발이 꽁꽁 얼을 만큼 추워도 정말 신났던 기억이 있다. 이후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고 나서도 굳이 그리고 딱히 아이스 스케이트를 탈 일은 없었는데 뉴욕에서만큼은 꼭 타보고 싶었다. 브라이언트 공원 안 스케이트장도 있고, 뉴욕의 중심인 센트럴파크에도 울만 링크 (Wollman Rink)라는 스케이트장이 따로 있었다. 게다가 3년 차 뉴요커 친구 왈 개인 스케이트를 지참하면 입장권이 무료라고 하니, 회당 $40-50 정도 하는 티켓값을 고려하면 $100짜리 스케이트를 구매해서 두 번만 타도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막상 얼마나 탈지도 모르는데 대충 스케이트를 골랐다가는 발병이 날 것 같고, 또 크리스마스 마켓 근처 아이스링크를 지나칠 때마다 거대한 인파를 피하다 지친 나는 비교적 조용한 동네의 스케이트장은 없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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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구경한 아이스 링크와 크리스마스 트리. 올해는 더더욱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만 지나가면 유튜브 "뉴욕세끼" 님이 생각난다.)

그렇게 방문하게 된 곳이 바로 나의 뉴욕 최애 공원, 도미노 파크의 아이스 스케이트 링크다. 비교적 최근이라고 하기에도 얼마 안 되는 시간은 바로 작년, 2024년 11월 개장한 도미노 파크의 시즈널 아이스 링크는 비교적 한산하고 또 주중에 방문하면 뉴욕 거주자 기준 입장료와 스케이트 대여비를 50% 할인받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 사는 동갑내기 뇌과학자 포닥 친구를 설득해서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주중 용감하게도 이른 퇴근을 계획했고 오랜만에 윌리엄스버그에 놀러 가서 스케이트를 타고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약속했다.


뉴욕의 수많은 공원 중 도미노파크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당연코 (비교적) 한산하다는 점과 눈앞에 펼쳐지는 윌리엄스버그 다리의 웅장함 때문인데 딱 그 두 가지 장점을 십분 만끽할 수 있는 아이스링크가 바로 도미노 파크 스케이트장이었다. 친구와 발 사이즈에 맞는 스케이트를 한 켤레씩 건네받고 곧바로 아이스링크 위로 발을 옮겼다. 마지막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 타본 거라 처음에는 허둥지둥 일색이었으나, 또 "근육 기억 (muscle memory)"라 할 수 있는 나 몸의 생리적 반응 덕분에 금방 균형을 잡고 속도를 즐기며 재미있게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 아주 살짝 비가 내리긴 했지만 한 바퀴 돌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맨해튼 야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십수 년 전 서울 시청 앞 아이스 링크에서 콧물을 흘리며 스케이트를 타던 어린이가 어느새 박사 학위를 마치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 도착한 어엿한(?) 포닥이 되었다니! 하고 말이다. 괜히 뭉클해지던 찰나 또 이렇게 미끄러운 아이스 링크 위에서 3단 회전을 이어가는 김연아 선수가 문득 대단하다고 느껴진 하루였다. 그날은 비도 오고 추워진 몸을 달래기 위해 일본 라멘을 저녁 메뉴로 선택했는데 평일 해피 아워라 어쩔 수 없이(?) 생맥주를 한 잔씩 마실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칭다오나 타이거 같은 아시아 라거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일본 맥주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선물과도 같은 아사히 생맥주였다. (또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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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일찌감치 다녀온 덕분에 저렴하게 체험할 수 있었던 도미노 파크의 아이스 링크. 초등학생 시절 서울 시청 앞에서 탔던 아이스 스케이트장이 생각났다.
IMG_4913.JPG 스케이트를 타면서 내 눈앞에 펼쳐진 맨해튼의 야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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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으며 스케이트도 타고 콧물이 날만큼 추운 날에는 라멘이 최고였다. 해피 아워를 핑계로 추가 주문한 가라아게와 아사히 생맥주는 올해 마신 맥주 중에 가장 맛있었다.

마지막으로 뉴욕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시즌을 대표할 수 있는 기억을 공유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갑자기는 아니고 예보한 대로 새벽 내내 그리고 아침까지 함박눈이 내렸던 12월의 두 번째 토요일이었다. 계속해서 흐린 날씨가 계속되며 창 밖의 모습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는데 핸드폰 날씨 어플을 보니 정오부터 구름이 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순간 곧바로 결심했다, 12시 땡 하면 곧바로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말이다.


예전부터 "하얀 센트럴 파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눈에 덮인 센트럴 파크의 Sheep Meadow와 The Great Lawn, 즉 새하얀 목초지와 잔디밭을 보고 싶었다.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유독 여름 뉴욕을 자주 경험했었던 것에 반해 추운 뉴욕은 아직 충분히 구경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서다. 물론 3월에 도착했을 때는 추위가 계속되어서 5월까지 패딩을 꺼내 입었고, 가을을 지나 초겨울 내내 굉장히 추웠지만 비바람만 거세게 불고 눈 소식을 당최 들려오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도 눈을 찾아서 맞는 편은 아니지만 (우리 엄마는 일부러, 굳이, 눈을 찾아서 맞으신다.) 뽀얗게 내린 눈과 도심 풍경과 함께 펼쳐질 공원의 설경이 기대되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을 간단히 차려먹고 100% 완충된 핸드폰과 일회용 필름 카메라까지 챙겨서 공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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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내내 설레다가 그치자마자 바로 카메라를 챙겨 센트럴 파크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친 설경이 눈 앞에 펼쳐졌던 감동적인 순간들.

나와 같은 세대라면 영화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 나오는 설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과장을 보태지 않고 딱 그 모습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정말이지 가사 속에서 형용되는 꼭 그 모습이었는데, 센트럴 파크의 웅장한 나무들이 워낙 키도 크고, 둘레도 굵기 때문에 스케일이 유독 남다르게 느껴졌다. 갑자기 <나니아> 속 미스터 툼누스가 뛰쳐나와도 놀랄 것 같지 않은, 또는 금방이라도 <러브 레터>의 여자주인공처럼 "오겡키데스까?"를 외쳐야 할 것만 같은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추운 줄도 모르고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영상을 남기며 공원을 걷고 또 걸었다. 아쉬웠던 건 풍경 사진만 가득 찍고 인물 사진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는 점인데 그래도 상관없었다. 영화 속 한 장면이라고 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뉴욕의 눈 내린 센트럴 파크를 내가 직접, 내 발로 걷고 있다는 감각 자체가 낭만적이라 참 좋았다. 나중에는 눈 웅덩이에 발이 빠져 양말이 다 젖고, 코트 단추를 채우지 못할 정도로 손이 얼어서 욕을 봤지만 상관없었다. 그날 내 눈에 담은 눈 내린 공원의 모습은 내가 뉴욕 포닥 생활 중 인생에서 갖게 될 코어 메모리가 될 것을 확인했다.

IMG_5296.JPG 눈 내린 센트럴 파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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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센트럴 파크 -2
IMG_5255.JPG 필름 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어떨지 너무 기대되고 설렌다. 한국 가면 남은 필름으로 마저 추억을 남기고 다시 출국하기 전에 인화 서비스에 맡겨야지!

당장 크리스마스이브 날 하루 종일 대기를 타다가 크리스마스 하루 내내 비행기 안에 갇혀 있게 된 신세지만 12월 내내 내가 느낀 이 도심 속 연말 분위기 덕분에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차분히 연말을 정리하며 그동안 주변 사람들한테 받은 귀한 마음들을 또 어떻게 보답할까에 대해 고민했고, 덕분에 귀국 전 충분히 선물 쇼핑을 할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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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생일 기념, 크리스마스 기념 친구가 선물로 보내준 예쁜 소포와 마음들. 나도 보답하기 위해 선물을 한가득 준비했다. 잘 챙겨서 공항으로 가야지.
IMG_5344.JPG 이웃 포닥 친구에게 연말 선물로 나눔 받은 두바이 쫀득 쿠키. 우리나라 유행의 여파가 맨해튼에까지 닿았다, 정말 맛있게 한 입 한 입 아껴먹었던 두쫀쿠.

물론 나에게 뉴욕에서 보낼 수 있는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 기회가 주어진다면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것들도 생겼다. 먼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호두까기인형> 발레 공연을 현지에서 꼭 보고 싶고, 앞서 언급했던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의 로케츠 (Rockettes) 무대도 꼭 관람해보고 싶다. 워낙 티켓 값이 비싸서 무심하게 공연을 즐기기는 아깝고, 기왕이면 투자한 김에 남자친구랑 같이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포닥 연구실을 정할 때는 당연히 도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나에게 이미 특별했던 이 도시에서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짧지만 지난 10개월 동안 나에게 더욱 소중해진 뉴욕에서 "크리스마스 인 뉴욕"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어 정말 영광스럽고 기쁜 마음이다. 남은 연말 연초는 한국에서 보낼 계획인데 뉴욕에서 12월 내내 만끽한 연말 에너지를 잔뜩 챙겨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오려고 한다. (아침에 쓰기 시작한 글인데 쉬엄쉬엄 썼더니 하루가 걸렸다. 이제는 진짜 슬슬 공항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다.)


이렇게 뉴욕에서 보내는 연말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이번 <다시, 뉴욕> 시리즈를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독자 여러분들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따뜻한 시간, 그리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기쁜 에너지를 가득 충전하는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다. 저는 논문 작업과 펠로십 지원 등으로 휘몰아칠 연초를 앞두고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좀 더 본업에 집중하며 열심히 연구하는 동안에도 뉴욕에서의 일상생활을 더욱 농도 짙게 느낄 수 있도록 성실하게 지내다가 더 풍부하고 재미있는 글거리로 찾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다시, 뉴욕>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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