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도시 그 자체의 드라마 촬영장

2 - 뉴욕 배경의 드라마 그리고 시트콤들

by 성급한뭉클쟁이

방금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된 HBO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 정주행을 마쳤다. 다른 수식어 없이 뉴욕 그 자체를 "The City"라고 칭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드라마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듯이 뉴욕에 오고 나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미디어 작품을 일부러 더 찾아보게 되었다. 이미 시청한 작품을 다시 찾아보든, 새로운 작품을 감상하든, 시대별로 그리고 주제별로 미디어 속에 담긴 뉴욕 시티의 모습을 구경하는 건 나에게 색다른 재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접한 (꼭 좋아하는 작품들만 있는 건 아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 그리고 드라마 몇 편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먼저 <가십걸 (Gossip Girl)>이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방영된 워너 브라더스의 <가십걸> 시리즈는 첫 Pilot 에피소드 방영 후 곧바로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뉴욕의 라이프 스타일이 가득 담긴, 게다가 수위도 꽤 높은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주인공들이 모두 십 대 (teenager) 소년과 소녀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도시의 많은 올드 머니 (Old money,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부를 가진 가문을 가리킨다.)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 (Upper East Side)에 위치한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시리즈인데 제목대로 "가십"을 테마로 한 이야기다.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며 각 인물들이 겪는 스캔들과 성장기를 담았는데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나에게는 불호인 드라마이다.


<가십걸>이 뉴욕의 상징적인 드라마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개인적으로 많이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처음 이 드라마를 접한 건 국제학교를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는 마지막 시즌이 방영되며 누가 "가십걸"인지, 그 신원이 밝혀지던 시기였는데 십 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보니 나도 소문이 무성한 드라마를 시청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온갖 험담과, 사보타주 (sabotage), 배신과 부정행위가 난무하는 줄거리가 불편했고, 무엇보다 미성년자 주인공들이 즐기는 문란한 성생활과 음주, 그리고 마약 복용 장면까지 나오니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MsMojo-Fi-T-Top10-Gossip-Girl-Moments-1080p30.jpg <가십걸> 주인공들의 단체 사진. 그 누구 한 명 성인이 아닌 십 대 소년과 소녀들이라는 점이 놀랍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십걸>이 이토록 상징적인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은데 역시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극 중 "패션" 때문이다. 워낙 부잣집 도련님과 공주님들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보니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명품을 기갈나게 소화했다. 맨해튼의 부자동네를 런웨이 삼아 도심 속을 누비는 주인공들을 보면 어떤 스타일이 유행하는지, 앞으로 유행할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두 주인공인 블레어 (Blair)와 세레나 (Serena)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가십걸 코어" 패션이 유행하기도 했다. 극 중 주인공들이 런웨이 삼았던 가장 상징적인 장소는 바로 센트럴 파크 동쪽 중간부에 위치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입구 앞 계단이다. "The Met"이라도 불리는 이 장소는 매년 뉴욕 패션위크 때마다 무도회가 열리는, 문화적으로 아주 상징적인 곳인데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들은 매번 학교 앞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The Stairs"에 가서 요구르트로 점심을 먹었다. "계단에서 만나"자는 말을 수시로 내뱉던 주인공들은 이곳에서 점심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작당모의를 통해 누군가를 사보타주할 것을 계획한다. 못 된 일들을 많이 저지른 고등학생들의 모임 장소인 이곳을 방문하면 미술관 관람객 외에도 예쁘게 입고 요구르트를 손에 쥐고 있는 관광객들의 모습 역시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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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블레어가 친구들과 요거트를 먹으며 아침 조회와 심부름, 그리고 친구들 괴롭힘을 이어갔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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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름에는 굉장히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공간이다. 뉴욕에 주소를 둔 로컬의 경우 입장료가 자율 요금제인데 민망할 정도만(?) 내고 메트로폴리탄의 전시에 다녀온적이 많다.

그 외에는 메디슨 에베뉴 (Madison Avenue) 50번가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 (Plaza Hotel)이다. 2015년 롯데가 인수한 이후로 Lotte New York Palace Hotel라는 이름을 갖고 운영 중인데 이곳은 극 중 주인공 척 (Chuck)의 가족이 운영하는 호텔로서 세레나의 가족이 임시로 머무는 보금자리로 등장한다. 플라자 호텔은 뉴욕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2018년 여름, 사수님이 데리고 와준 적이 있는 곳이다. 당시 여학생이었던 인턴 세 명을 위해 점심시간에 <가십걸> 촬영지인 플라자 호텔 중앙 정원에 와서 포장한 Roberta's Pizza를 나눠 먹은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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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 에비뉴 50번가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 (공식 사진, 왼쪽). 호텔 로비 앞이지만 점심시간을 활용해 피크닉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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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Urban Space에 위치한 Roberta's Pizza에서 포장 주문한 피자 세 판. 너무 신선하고 플라자 호텔 정원의 분위기가 좋아서 넷이서 금방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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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네트워킹 행사를 위해 다녀온 롯데 플라자 호텔. 연말 시즌에 맞춰 꾸며진 외부 크리스마스 트리와 내부 장식들이 유독 멋있게 느껴졌다.

당시 여름의 푸릇함도 매력 있었지만 최근에는 취업박람회/네트워킹 행사 참석을 위해 같은 장소에 다녀오게 되었다. 덕분에 눈이 듬뿍 내리는 날 맨해튼 5성급 호텔의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 그리고 케이터링 (catering)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락커펠러 플라자 앞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예쁜 데코레이션이라고 생각했다. 내부 인테리어의 따뜻함과 연말 겨울이 가득 담긴 분위기가 매력적이었고, 모든 디테일에서 "값비쌈"이 느껴졌다. 같은 장소에서 세레나와 댄이 썸 타는 모습을 상상하니 더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로 소개할 시트콤은 바로 <하우 아이 멧 유어 마더 (How I met your mother)>다. 한국 제목은 이를 그대로 직역한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라고 하는데 2005년부터 아홉 시즌이나 방영된 시트콤 시리즈다. (여담 1: <가십걸>은 총 여섯 개의 시즌이 제작되었다.) 이번 드라마는 이전까지는 관심이 없다가 올해 뉴욕에 와서 시청하게 된 시리즈다. 개인적으로 시청할 드라마를 선택하는데 각 배역을 연기한 배우가 많이 중요한 편인데, 포스터 속에 있는 주인공들 중 나에게 특히 끌리는 배우가 없었다는 이유가 큰 것 같다. 이전에도 웃긴 장면을 모아둔 "짤"들로 많이 접했던 드라마인데 이번 기회를 통해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how-i-met-your-mother.jpg <하우 아이 멧 유어 마더>의 주인공들. 개인적으로 정가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역시나 그렇게 매력 있는 작품은 아니어서 끝까지 정주행 하기 비교적 힘들었다. (여담 2: <가십걸>은 개인적으로 너무 재미가 없어서 끝까지 보지도 못했다.) 일단 공감 가는 캐릭터가 없었다. "Hopeless romantic (성공적인 연애를 원하지만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견해 탓에 실제로 연애를 하지 못하는 낭만주의자)"인 건축가 테드 (Ted)와 대학시절부터 장기 연애를 이어가는 변호사 마쉘 (Marshall)과 미술가를 꿈꾸는 유치원 선생님 릴리 (Lily), 직업은 모르겠으나 부자고 여자를 끔찍하게 좋아하는 바니 (Barney)와 미국에서 아나운서로 성공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 캐나다인 로빈 (Robin)의 이야기다. 우선 각 인물의 배경만 봐도 나의 관심을 끌 특징이 전혀 없거니와, 계속해서 어긋나는 로맨스 라인(?)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서로 진심인듯하나 또 가볍고 헤픈 관계성이 드러나는 장면을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존경하거나 열망의 대상이 될 만한 페르소나가 없었는데 나 역시 제목에 낚여 "엄마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끝까지 정주행을 마쳤다.. 마지막화를 보고 내가 느낀 배신감과 허망함 역시 대단했고 말이다..


그래도 극 중 반가운 장소들도 많았다. 주인공 테드는 현재 내가 속한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시즌 후반부에서 말이다.) 어퍼 웨스트사이드를 주 무대로 삼고 있는 주인공들이 모이는 장소인 MacLaren's Pub와 (실제로는 55번가에 위치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맨해튼의 레거시로 자주 언급하는 자바스 식료품점 (Zabar's) 역시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전 글에서도 소개했듯이 깔끔함과 유대인 출신 뉴요커들의 유산을 느낄 수 있는 어퍼 웨스트사이드를 산책할 때면 이곳들을 자주 지나치게 되는데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자주 생각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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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모스비 (Ted Mosby)가 극 후반 임용된 컬럼비아 대학의 본 캠퍼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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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고급 식료품점 겸 카페. 드라마 <프렌즈>에서도 자바스 쇼핑백이 등장한다.

다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섹스 앤 더 시티>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장 최근 정주행을 마친 작품인데 <가십걸> 그리고 <하우 아이 멧 유어 마더>와 다르게 너무 재밌어서 한 편 한 편 아껴본 드라마다. 이전에 드라마 <프렌즈>를 소개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원고의 모든 분량을 이 드라마를 위해 쓸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우선 간단하게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정말 믿기 어렵지만 거의 30년 전인 1998년에 첫 방영이 된 본 작품은 뉴욕, 아니 맨해튼에 사는 네 명의 친구 —캐리, 사만다, 미란다, 샬롯—가 사랑, 연애, 섹스, 결혼, 커리어에 관한 성장기를 담은 드라마다. 엄밀히 따지자면 캐리가 주인공인데 그 이유는 바로 드라마 제목이 그녀가 연재하는 연애 칼럼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아 사이에서 고민하는 작가인 캐리와 자유로운 연애와 자기만족을 가장 중요시하는 PR 매니저 사만다, 현실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소 냉소적이고 커리어 중심인 변호사 미란다와, 명문대를 졸업하고 갤러리를 운영하는 샬롯은 로맨틱하고 전통적인 결혼관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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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서야 보게됐다 싶지만 서른이 된 나에게 이제 때가 된게 아닌가 싶었던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 캐릭터 한 명씩 자세한 코멘터리를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작품이다.

우선 인물 소개만 봐도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왕창 담겨있다. 주인공이 작가라는 점은 내가 (박사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 연구실에서 매일 실험과 분석을 이어가는 포닥임에도 불고하고) 꿈꾸는 커리어를 갖고 있는 인물이고,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 여자친구들끼리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모여서 수다 떠는 장면들은 나에게 큰 공감대를 샀다. 물론 당시 시대를 고려했을 때 모든 주인공이 백인이라는 점을 간과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2025년 작이었다면 인종이나 민족성이 훨씬 더 다양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작품이다. 게다가 여성 서사가 가득 담긴 "성장기"라니.. 물론 이름값대로 수위 높은 장면들이 꽤 자주 등장해서 놀랄 때도 있었지만 (하지만 이제 서른이 넘은 성인이니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드라마였다.


이런 포괄적인 주제 외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요소는 아주 다양했는데 첫 번째는 바로 디저트다. 고정관념적으로 (stereotypically) 여자 친구들끼리 모여 수다를 떠는 장면이 극 중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배경은 보통 아침 식사를 위한 브런치 카페, 저녁에는 맛집이나 고급 바 (bar), 그 외에는 도심 속 카페나 공원에서 디저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그리고 <섹스 앤 더 시티>가 뉴욕의 유명 베이커리인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Magnolia Bakery)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1998년부터 방영된 이 드라마는 1996년 매장을 오픈한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컵케익을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는데 덕분에 이는 뉴요커를 대표하는 디저트 빵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미 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인 데다가 한국에도 잠깐이지만 판교 현대 백화점에 입점했던 적이 있는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는 맨해튼에 지점이 많기 때문에 접근성이 훌륭한 디저트 베이커리다. 덕분에 가장 유명한 메뉴인 바나나 푸딩이나 컵케익등을 사 먹기 위해 자주 들리는 곳이 되었는데 생일 케이크로 당근 케이크를 맛본 적도 있고, 땡스기빙을 기념해서 애플파이 맛 바나나 푸딩을, 그리고 가을 시즌에는 펌킨 스파이스 맛 바나나 푸딩을 즐긴 경험이 있다. 이제야 드라마 정주행을 마친 거라 매번 드라마 주인공들을 염두에 두고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를 방문한 건 아니지만 괜한 친밀감에 더 자주 방문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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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캐리와 친구들이 자주 방문했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덕분에 지난 30년동안 뉴욕을 대표하는 디저트 빵집으로 자리잡은게 아닌가 싶다.

드라마의 또 다들 매력은 바로 패셔너블 (fashionable)함이다. 패션 업계 종사자가 있거나, 여러 패션 브랜드를 집적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주인공 네 명에게 패션은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되어준다. 주인공 캐리는 (당시 기준임에도 불구하고) $3-400 하는 구두를 백 켤레쯤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그런데 살 곳은 찾지 못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당시 버킨백이 갖고 싶었던 사만다는 PR 고객의 명의를 사용해서 이를 쇼핑하러 간다. 당시에도 아무나 구할 수 없다는 점은 그대로이지만 $4,000이면 버킨백을 구매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게 느껴진다. 지금 가격은 얼마이려나.. 개인적으로 운동화가 아닌 로퍼나 단화만 신어도 발이 아픈데, 힐이 적어도 1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뾰족구두를 신고 잘도 뛰어다니는 캐리는 예쁜 구두는 라이프 스타일 선택지뿐만 아니라 맨해튼에서 살고 있는 30대 커리어우먼의 "기본 인권"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녀는 발바닥이 빨간 크리스천 루부탱 (Maison Christian Louboutin) 구두를 자주 신는데 그녀와 친구들의 대화나 쇼핑 장면을 보다 보면 사치스러움을 사랑스럽게 담아낸 것 같아 귀엽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직접 따라 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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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를 못 내서 쫒겨날 상황이 머지 않았지만 구두 쇼핑은 포기할 수 없던 캐리의 멘붕 장면 (왼쪽), 그리고 30년 전에는 에르메스의 버킨백이 $4,000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맨해튼 소호 (SoHo)에서 촬영되었는데 나 역시 아주 자주 가기엔 어려워도 (꼭 예산 때문은 아니고 특히 주말에 가면 인파가 너무 많기 때문에 평소 걸음 속도대로 걷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심미안을 키우기 위해 자주 방문하는 동네 중 한 곳이다. 아주 비싼 명품 아뜰리에뿐만 아니라 비교적 감당할 수 있는 가격대의 브랜드 샵도 많이 자리 잡고 있는데 소호 거리에서 샵을 구경하며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 보다 보면 딱 "견문"해서 "생심"하기 쉬운, 그런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당시에는 작가로서 맨해튼에 살면 그만큼 럭셔리한 라이트 스타일이 가능했을지 진심으로 궁금하긴 하지만, 그런 질문은 삼가 기로 하고, 아무쪼록 에피소드마다 전반적으로 패셔너블하고 위트 있는 제목도 마음에 들고, 주인공 캐리의 칼럼을 읽는 듯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정말 좋았다. 그녀들의 성장통이 담긴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내용들 모두 공감 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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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소호를 방문하게 되면 괜한 사치를(?) 부리고 싶어진다. 아우터 한 벌에 $300-400이 넘어가는 옷을 입어보면서 마음 아픈 견물생심에 일주일 정도 고생하는 루틴이다.

다음 소개할 작품을 위해서는 맨해튼이 아닌, 뉴욕의 다른 자치구인 브루클린으로 넘어가 보자. 바로 <브루클린 나인-나인 (Brooklyn 99)>이다. 이번 드라마는 브루클린의 99번째 관할 경찰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에피소드에 담은 시트콤 시리즈인데 2021년 완결된 비교적 최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시리즈를 강력히 추천할 만큼 취향에 맞는 작품은 아니었으나 완주하는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주연 배우인 Andy Samberg가 미국 SNL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라 비교적 선입견이 포함된 의견일 수도 있지만 SNL (Saturday Night Live) 스러운 코미디를 좋아하면 추천하고 싶은 시트콤이다. 맥락 없는 드립이 난무하고, 캐릭터들도 개그를 위해 "맹구스러운" 모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재미를 위한 타임 킬링으로 적합한 시트콤이었다. 그리고 드라마가 아니라 시트콤이라는 점은 에피소드 하나당 20분 내외였다는 점인데 계속해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대신 하루의 시작 또는 끝에 재미를 더하는 시트콤 한 편을 보는 취미가 있는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아무래도 시리즈 제목대로 브루클린이 배경이다 보니 다양한 장소가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장소는 바로 덤보와 브루클린 다리가 아닐까 싶다. 포스터 자체에도 포함되어 있는 브루클린 다리는 밤이든 낮이든 걷기에 아름다운 곳이라 꼭 추천하고 싶고, 또한 브루클린 자치구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인 덤보 역시 계절에 상관없이 멋진 광경을 자랑하기 때문에 꼭 추천하고 싶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처럼 한산한 모습을 구경하기엔 어려운 곳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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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99>의 배경인 브루클린 다이. 한 여름 밤 문득 퇴근 후 날씨가 너무 좋아 지하철을 타고 로워 맨해튼 까지 내려가서 브루클린 다리를 뛰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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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린을 대표하는 세 개의 다리 중 (브루클린, 맨해튼 그리고 윌리엄스버그 다리) 가장 영화 다운 장면을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덤보 (DUMBO)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개인적으로 부동의 최애 시리즈인) 소개할 작품은 바로 <프렌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94년부터 열 시즌에 거쳐 방영된 <프렌즈>는 단연코 뉴욕을 대표하는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사실 <프렌즈>는 내가 오랜 시간 너무나도 좋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전 글에서도 따로 소개한 적이 있다. <내가 미드 프렌즈를 사랑하는 네 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쓴 글인데 거의 4년 전에 쓴 글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강렬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https://brunch.co.kr/@hastysentiment/119

2022년 2월, <프렌즈>에 대한 글을 쓴 이후로 내가 경험한 뉴욕과 그 도심 속 <프렌즈>는 더 깊고 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선 2023년 10월 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 "챈들러 (Chandler)"를 연기한 배우 매튜 페리 (Matthew Perry)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990년대 <프렌즈>를 시청하며 이를 추억하던 온 세상 사람들이 슬퍼한 일이었다. 마침 그 해 11월,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뉴욕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맨해튼 서남쪽의 그린위치 빌리지 (Greenwich Village)의 Bedford가에 위치한 "모니카 갤러 아파트"를 우연히 지나친 기억이 있다. 당시 함께 동행했던 언니와 일부러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소호를 향하던 중 그 거리를 거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챈들러, 이를 연기한 매튜 페리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Bedford가를 방문하던 중이었다. 곳곳에 꽃다발과 편지, RIP (Rest In Peace) 문구가 담긴 포스터가 가득했는데 많은 커플의 이상적 목표 (couple goal)이 되어준 "몬들러 (Mondler), " 즉 모니카와 챈들러가 유독 더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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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 챈들러를 연기한 배우 매튜 페리의 부고 소식은 전세계 수많은 <프렌즈> 팬덤을 슬프게 했다. 그를 위한 도심속 추모 현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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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여섯 명의 친구들이 등장할 것 같은 그린위치 빌리지 속 모니카 갤러의 아파트 외부 모습이다.

모니카의 아파트 외에도 <프렌즈>의 배경이 된 수많은 장소가 있는데 남자 대 여자로 미식축구 내기를 센트럴 파크 (The One with the Football), 아빠 카드로 쇼핑을 즐기던 레이첼의 첫 "어른" 직장이 되어준 블루밍데일 백화점, 레이첼과 로스가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밤새 데이트를 즐긴 뉴욕 자연사 박물관 (The One Where Ross and Rachel... You Know), 그리고 후반 시즌에 로스가 종신 재직 교수로 임용된 뉴욕 대학교 등이 있다. 실제로 내가 2018년 직접 뉴욕에 와보기 전까지 간접적으로 뉴욕의 문화에 대해 가장 많이 알게 된 매체가 바로 <프렌즈>가 아닐까 싶다. Macy's 백화점의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도 <프렌즈>에서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촬영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LA 할리우드의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는 점이 모순일 수 있지만 <프렌즈>는 나에게 뉴욕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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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물학 (paleontology)을 전공한 박사였던 주인공 로스가 출근하던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 박물관 폐관 후 레이첼과 로스는 달콤한 데이트를 많이 즐겼다.

극 중 배경이 되었던 뉴욕의 장소들 외에도 <프렌즈> 때문에 생겨난 명소도 있다. 먼저 매디슨 스퀘어 파크 근처의 The FRIENDS™ Experience: The One in New York City인데 드라마 세트장처럼 꾸며둔 공간에서 기념사진을 찍거나 전시를 구경하고, <프렌즈> 팬들만 이해할 수 있는 "밈 (meme)"과 유행어가 담긴 귀여운 기념품들도 구매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가상의 공간이었던 Central Perk 카페가 최근 타임스퀘어 근처에 문을 열었다. 가구부터 메뉴까지 <프렌즈>를 테마로 한 카페인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지만 조만간 들리고 싶은 곳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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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의 대표 유행어 "How You Doin'?" 과 <프렌즈> 박물관 외부에 전시된 유행어 네온 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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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프렌즈> 팬이라면 유행어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정확한 에피소드와 대사들을 떠올릴 수 있어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주어진 시간 동안 집중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영화도 매력 있지만, 주인공의 성장 서사를 시즌 별로 감상하기에는 드라마나 시트콤만큼 좋은 매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첫 pilot 에피소드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만 스토리라인이나 배경, 주인공의 성격이나 인물 관계도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순간 에피소드 하나하나 아껴보게 되는 게 내 마음인 것 같다. 최근까지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칼럼니스트 캐리가 주인공인 <섹스 앤 더 시티>가 그랬고 말이다. (물론 내 최애 캐릭터는 미란다와 사만다였다.) 내가 사랑하는 캐릭터들이 누볐을 뉴욕 도심 속 곳곳을 탐방하며 앞으로도 그 들이 먹었을 컵케익, 마셨을 커피와 더불어 산책했을 공원과 사랑을 나눴을 로맨틱한 장소에도 계속해서 내 발을 직접 담그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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