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도시 그 자체의 영화 촬영장

1 - 뉴욕 배경의 영화들

by 성급한뭉클쟁이

뉴욕에 와서 새로 생긴 취미 중 하나는 바로 뉴욕을 배경으로 한 미디어를 찾아보는 일이다. 책도 좋고, 영화도 좋고, 드라마도 좋다. 익숙했던 동네들을 새로운 눈으로 느끼고, 미디어 속에서 접한 뉴욕의 장면들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떠올리기 위해 해당 장소를 방문하는 일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서다.


이러한 나의 개인적인 취미활동 외에도 "뉴욕 여행"이라는 키워드로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여행 가이드 포스팅을 살펴보면 영화 속 한 장면을 재연하기 위해 특정 장소를 방문해 보라는 조언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1984년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덤보 (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가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2004년 종말론적 재난 영화인 <투모로우>의 영화 포스터인데 뉴욕만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는 아니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높아진 수면 아래로 잠기며 그녀의 횃불마저 빙하처럼 얼어버린 모습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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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브루클린의 덤보 (DUMBO). 1984년 개봉작 <원스어폰어타임> 영화 포스터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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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선셋 크루즈 (Sunset Cruise)"를 타고 강가에서 바라봐도 저렇게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 수면 아래로 잠기고 얼어버린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그 외에는 내가 뉴욕에 직접 오기도 전에, 이곳을 자주 방문하다가 박사 졸업 후 포닥으로서 뉴욕에서 지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도 훨씬 전부터 굉장히 사랑했던, "제일 좋아하는 영화 (favorite movie)가 뭐야?"라는 스몰톡스러운 질문에 반드시 대답하는, 무엇보다 새로 개봉한 영화보다 좋아하는 영화를 재관람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는 내가, 문자 그대로 (literally) 열 번 이상씩 시청한 나의 보물함 속 "뉴욕" 영화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누가 뭐래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일 것이다. 영어 제목 역시 그대로 "The Devil Wears Prada"인 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2006년도 코미디 패션 영화다. 미국 명문대인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최고의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해 뉴욕에 도착한 주인공 앤드리아 삭스, 그녀가 기자가 아닌 세계 최고 패션 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의 말단 비서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녀의 성장기를 담은 내용이다. 개봉 당시뿐만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너무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 굳이 영화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개봉했던 2006년 아직 만 열 살을 조금 넘긴 나이었던 나는 영화 속 모든 장면이 황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작부터 신나는 비트의 <Suddenly I see> 노래가 흘러나오며 "Her face is the map of the world"라는 가사가 흘러나오며 앤드리아는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소박한 그녀의 모습이 극 후반부의 화려한 모습과 극심한 대비를 이루게 되는데 어떤 모습이든 잘 소화해 내는 배우 앤 해서웨이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순간이다. 이 영화는 뉴욕 생활의 영광스러움과 옷을 잘 입는 건 어떤 의미인지, 사치스러운 과소비를 상징하는 패션 산업이 어떻게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지, 무엇보다 인구 800만이 넘는 대도시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나에게 직접적인 인상을 심어주었고, 더 큰 어른이 되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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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개봉한 전설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최근 후속편 제작이 확정되면서 맨해튼 곳곳에서 주연 배우들 목격담이 인터넷을 떠돌았는데 내년 봄 2편이 기대되는 바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다 보면 또 궁금해지는 결정적인 것들은 소소한 뉴욕의 먹거리들인데, 첫 인터뷰 전 평소와 같이 길거리에서 어니언 크림치즈 베이글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앤드리아의 모습을 보면 (그리고 그 향 때문에 잔소리를 듣게 되는 장면을 보면) 굳이 자리 잡고 앉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끼니를 때우는 뉴요커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극 중 앤드리아의 남자친구 네이트가 퇴근한 여자친구를 위해 치즈 토스트를 만들어주는 장면이 있는데 계속해서 사이즈 6을 입을 수 없고 슬슬 다이어트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앤드리아는 토스트를 거부하고, 남자친구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대신해서 한 입 베어 먹는다. 겉으로 보기엔 많이 탄 것 같지만 바삭하게 씹어먹는 그 소리를 들으면 절로 배가 고파진다. (도대체 무슨 치즈를 넣고, 빵을 버터에 얼마나 구우면 저렇게 될까 궁금해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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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리아의 아침 메뉴에 영감을 받아(?) 베이글을 더 자주 먹게 된 것 같다. 탄단지까지 챙겨주는 베이글 샌드위치도 좋지만 쪽파 크림치즈에 푹 찍어먹는 팝업 베이글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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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과 주방용품을 다루는 Fishs Eddy 매장에서 발견한 "베이글 인(人)" 전용 머그. 어떤 사람이 베이글 인인지에 대한 상세한 조건이 귀여운 머그잔이다.
FWczRCSXgAItPKX.jpg 퇴근 후 노스웨스턴 대학교 후드티를 입고 다이어트를 결심하며 남자친구표 치즈 토스트를 거부하는 앤드리아의 모습. 내가 대신 먹어주고 싶었다.

프로페셔널 "간지"를 추구하는 나에게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알려준 앤드리아 삭스, 아니 앤 해서웨이 배우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외에도 영화 <인턴>에서 또 한 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벌써 십 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지만) 2015년작 영화 <인턴>은 앤 해서웨이와 영화 <대부>의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 영화다. 창업 1년 반 만에 큰 성공을 거둔 패션 스타트업 여성 CEO인 줄스의 회사에서 수십 년 직장생활에서 비롯된 노하우와 나이만큼 풍부한 인생 경험을 무기 삼아 채용된 만능 70세 벤의 성장 스토리다. 개인적으로 로버트 드 니로 배우를 대표작 <대부>가 아닌 영화 <인턴>에서 처음 보게 되었는데 일흔이 넘었지만 계속해서 배움을 추구하는, 게다가 주변 사람들의 성장을 돕는 할아버지 인턴의 모습이 참 따뜻하고 정겨워서 큰 인상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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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앤 해서웨이 덕질 영화는 바로 2015년작 <인턴>이다. 미팅 후 벤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의 스프 먹방이 인상 깊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요 배경이 맨해튼이었다면 영화 <인턴>의 배경은 공장지대였다가 힙한 동네로 탈바꿈한 브루클린과 윌리엄스버그가 배경이 되는 곳인데 그래서인지 "뉴욕"하면 떠오르는 마천루들과 "컨크리트 정글" 대신 아기자기한 동네와 이를 배경으로 한 줄스의 회사 오피스, 그리고 커피숍이 눈에 띄는 영화다. 실제로 윌리엄스버그의 중심에 위치한 파트너스 커피 (Partner's Coffee)는 자주 방문하게 되었는데 되려 나중에 이곳이 <인턴>의 촬영 장소라는 점을 깨닫고 유독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같은 동네에 들리게 되면 다른 곳을 탐방하는 대신 일부러 파트너스 커피 매장을 찾게 되고 말이다. (마치 자주 갈수록 내가 앤 해서웨이로 거듭날 것을 기대하는 애청자처럼 말이다.) 극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인턴 벤 할아버지가 끊임없이 줄스를 챙겨주는 장면들인데 차기 CEO 후보 면접을 마치고 화나고 지친 줄스를 위해 따뜻한 수프를 미리 준비해 준 모습 (영화를 보다가 군침이 돌아서는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인생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커리어에 집중해 온 스스로를 탓할 때 "네 잘못이 아니니 그러지 말라"라고 따끔하게 말해주는 벤의 모습이다. 거의 영화 <굿 윌 헌팅>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It's Not Your Fault"라고 말해주는 장면과도 겹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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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버그에 위치한 파트너스 커피 매장. 근처에 들리게 되면 자주 들리는 곳이다, 원두도 훌륭해서 홀푸즈에서 자주 사마시고 있다.

누가 봐도 앤 해서웨이 배우의 성장 스토리를 아주 좋아하는 팬인 것이 드러났는데 그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뉴욕" "성장 스토리" "여성 주인공"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영화가 또 한 편 있다. 바로 넷플릭스 원작의 "Set it Up"이다. 2018년에 넷플릭스에서 제작하고 공개한 이번 영화의 한글 제목은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이다. (개인적으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의역 가득한 제목이긴 한데 이건 다음 기회에 더 논의해 보도록 하자.) 영어로 "Set Up"은 두 사람의 로맨틱한 만남을 위해 주변사람들이 직접 나서 소개팅을 주선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일중독 상사 아래에서 미친 듯이 바쁘게 지내는 뉴요커 비서 둘이서 상사들이 서로 눈이 맞아 일 대신 연애에 시간을 쏟길 기대하는 큐피드 대작전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상사 커스튼과 같이 유명하고 실력 있는 스포츠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은 하퍼는 비서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막상 중요한 글쓰기에 투자할 시간을 잃어버리고, 짧고 굵게 고생해서 투자자로서 큰 성공을 꿈꾸는 찰리는 투자회사 파트너의 비서 일을 자처하여 현실판 "노예"처럼 시달리는 삶을 이어간다. 개인 시간은커녕 건물 미화원보다 늦게 퇴근하는 둘은 상사에게 시달리는 삶을 이어가다가 시라노 대작전을 꾸리게 되는데 (스포일러 포함입니다만..) 결국 두 사람이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달콤하고 웃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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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입에 붙지 않는 제목이지만 사랑스러운 여주인공과 능글 맞지만 계속 생각나는 남주인공이 매력있다고 생각한 로맨틱 코미디 작품이다. 아마 열 번 정도 시청한 것 같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랜만에 "로코 (로맨틱 코미디)" 다운 로코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0-2010년이 미국산 로코의 전성기라고 생각했는데 몽글몽글한 감성과 사랑스러운 여주 (단, 무조건 귀엽기만 하면 안 된다. 자신의 꿈이 분명하고 목표지향적임과 동시에 어느 정도 보살핌이 필요한 여성 인물이어야 더 매력 있다.), 그리고 능청스럽지만 느끼하지 않은 (무엇보다 꽤나 잘 생기고 키가 큰) 남주가 이어가는 성장이 담긴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갈수록 귀해진다는 인상을 받던 중이었다. 2018년 작이라고 하니 이미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놀랍지만 나에게 넷플릭스 원작 "Set It Up"은 그런 영화였다. 아무리 로맨틱 코미디 영화여도 나는 주인공들의 성장이 담긴 서사를 훨씬 더 좋아하고, 그들이 겪는 고민 속에서 나였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많이 공감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볼 것이 다양한데 시라노 작전 회의를 위해 하이라인 (High Line)을 걷는 모습도 유명하고, 양키 스태디움에서 경기를 직관하며 "키스 캠 (Kiss Cam)" 촬영 기사를 매수(?)하고, 뉴욕의 청춘답게 루프탑 파티를 이어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연애하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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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하이라인을 걸으며 작당모의 하는 모습 (왼쪽). 결국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비공식적인 데이트를 즐기며) 사랑에 빠지게 된 거리를 나는 감자칩과 함께 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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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시원한 건물의 모습과, 정신없는 차도 옆 보행자 거리를 벗어나 색다른 높이에서 뉴욕 도심을 걷기 훌륭한 장소다. 2키로미터가 조금 넘는 길이라 아쉽지만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곳.

게다가 사회 초년생으로서 뉴욕에 살고 있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부족해도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청춘 그 자체였다. 좁은 집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비싼 렌트를 지불하며 뉴욕 생활을 이어가도 그 들에게는 꿈이 있으니 상관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성장"외에도 "사랑"에 대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 역시 이 영화에서 접하게 되었는데 바로 "Like is because, Love is despite"이다. "좋아함은 '그래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이 문구는 (당최 찾을 수 없던)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나에게 훌륭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처음에는 멋지고 예쁜 모습에 끌릴 수 있겠으나 결국엔 흠집도 "완벽한 결점"으로 인지하고 그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운 누군가를 만나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성장을 도모했던 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도 반드시 자연스럽게 성장 스토리가 담긴 영화를 즐겨보게 되었는데 물론 그 외에도 내 확고한 취향을 담아 계절마다 고유한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시청하는 영화들이 있다. 비교적 영화 편식이(?) 심한 편이지만 좋아하는 히어로물도 있고, 대규모 스케일의 재난 액션 영화도 때에 따라 즐겨보는 편이다. 먼저 시즈널 한 영화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연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실컷 느낄 수 있는 영화인데, 뉴욕의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영화는 바로 <나 홀로 집에 2>가 아닐까 싶다. 영어 부제목으로는 "Lost in New York" 즉 "뉴욕을 헤매다"라는 내용인데 1편에서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연휴를 강제(?) 혼자 보내게 된 어린이 주인공 케빈의 우당탕탕 뉴욕에서 살아남기 이야기다.


<나 홀로 집에 2>에서는 상징적인 공간들이 여러 곳 등장하는 첫 번째는 바로 센트럴파크 남쪽, 59번가의 동쪽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이다. 잠깐 지나치는 카메오 역할이지만 1992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의 모습도 볼 수 있고, 리무진 서비스와 사치스러운 룸 서비스를 마구마구 시키는 케빈의 씀씀이가 놀라울 뿐인 호텔 속 장면들을 보면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내 자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에 살짝(?) 짜증도 나고 말이다..) 워낙 위치가 훌륭한 호텔이다 보니 자주 지나치게 되는 호텔인데 올 3월에는 함께 뉴욕까지 동반해 준 아빠의 귀국길을 배웅해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플라자 호텔 앞을 뛰어가는 마라톤 참가자들을 볼 수 있었다. 센트럴 파크 앞에 우뚝 서있는 이곳의 부동산 그리고 문화적 가치는 얼마 정도일지 가늠도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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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파크 동남쪽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 (왼쪽). 3월 초 마라톤 코스로 변신한 플라자 호텔 로비 모습을 구경했다. (귀가길에 고생을 했지만 말이다.)

그 외에 또 상징적인 곳을 바로 라디오 시티, 락커펠러 플라자 (Rockefeller Plaza)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다. 홀로 뉴욕행 비행기를 타는 바람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겪고 엄마를 그리워하는 케빈이 이듬해 크리스마스 소원을 비는 장소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아닌, 선물도 필요 없으니 꼭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고 말이다. 순간 락커펠러 플라자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뒤편에서 케빈의 엄마가 마법처럼 그 둘은 재회하게 되는데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장면의 감동을 다시 느끼기 위해 매년 수만 명의 여행자들이 (그리고 몇 안 되는 신입 뉴요커들도..)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하러 미드타운 50번가를 찾고 있다.


나 역시 뉴욕으로 이사오기 전 계절별로 이 도시를 경험한 적은 많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은 처음이었다. 2023년에는 처음으로 추운 뉴욕을 경험했으나 크리스마스트리가 공개되기도 전인 땡스기빙 주간이었고, 그 후 포닥 인터뷰 때문에 잠시 들렸던 건 이듬해 2월이었다. 올해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상징적인 크리스마스트리 중 손에 꼽힐) 락커펠러 플라자 크리스마스트리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신이 났었다. 하얗게 변할 도심 속, 그리고 공원들의 모습도 궁금했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많을걸 예상하더라도 꼭 직접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12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친구와 커피 약속을 마치고 귀갓길에 들린 라디오시티는.. 말 그대로 "카오스 (chaos), " 혼란 그 자체였다.. 너무 안일했던 나의 태도가 문제였을 수도 있겠으나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평소 걸음 속도대로 걷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와중에 안전을 위해 쳐둔 펜스 사이로 보행자들이 끼는 일이 잦았다. 결국 줄을 서서 어떻게든 트리 앞으로 다가가 최대한 폰 카메라를 줌인해서 트리 모습을 담기는 했으나, 황홀한 트리 모습에 대한 감동 대신 다시는 직접 오지 말아야지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경험이었다. 케빈은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혼자 소원을 빌고 엄마를 발견하던데, 역시 영화 속 연출된 장면은 너무 굳게 믿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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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듣는 케빈이 마침내 엄마와 재회한 락커펠러 플라자 앞 크리스마스 트리. 실제로 가보면 홀로 서있을 수도 없고, 케빈 엄마가 케빈을 절대 못 찾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어로물 중에서는 뉴욕을 침공한 외계인들과 사우는 <어벤저스>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나는 마블사의 모든 히어로를 따라갈 정도로 진심 어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히어로는 딱 두 명인데 바로 공대 출신 아이언맨과 범생이 출신 스파이더맨이다. (역시 이공계 사람들은 서로를 답답해하지만(?) 결국 서로를 제일 좋아한다.) 스파이더맨 중에서는 토비 맥과이어가 연기한 1세대 스파이더맨을 가장 좋아한다. 2세대 스파이더맨을 연기한 앤드류 가필드는 너무 잘생겨서 전체 스파이더맨 줄거리와 개연성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3세대 스파이더맨 톰 홀란드는 어딘가 동생 같아서 아무리 대단한 능력치를 자랑하는 스파이더맨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챙겨줘야 할 것 같아서 믿음직스러움이 덜 한 것 같고 말이다.


무튼 1세대 스파이더맨 토비 맥과이어가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던 Joe's Pizza 역시 뉴욕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타임 스퀘어점은 줄이 너무 길어서 추천하지 않는다. 아무리 맛이 좋아도 피자 몇 조각을 한두 시간 줄을 서서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윌리엄스버그점으로 가면 훨씬 짧은 줄에 (운이 좋다면 바로 들어가서 피자를 받을 수도 있다) 공간도 비교적 널찍하고, 좀 더 여유 있는 피자 먹방이 가능하다. 이곳을 다녀간 해외 유명인들 사진을 구경하면서 스파이더맨을 떠올려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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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버스 지점의 Joe's Pizza. 내부 벽에 박물관 전시처럼 꾸려진 유명인들의 인증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도심 속 영화 촬영장은 바로 <투모로우>에 등장하는 뉴욕 공립 도서관 (New York Public Library)다. NYPL이라는 이니셜로 불리는 뉴욕의 공립 도서관은 사실 브라이언트 공원 (Bryant Park) 옆 외에도 여러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장 크고 대표적인 도서관이 바로 이곳이다. 나에게 이곳이 의미 있는 이유는 멋진 건물 외부와, 호그와트 도서관 분위기를 풍기는 내부 열람실, 그리고 구경하기 좋은 도서관 굿즈샵 외에도 이곳이 영화 <투모로우>의 최후 생존자들에게 궁극적 요새가 되어주었다는 점이다. 영화 속과 같은 재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도서관 건물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우선 서가와 책이 무겁기 때문에 건물의 바닥 하중을 강화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종이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내화구조나 소화설비가 엄격한 덕분에 더욱 안전한 경향을 보인다. 게다가 영화에서처럼 기온이 너무 낮아졌을 때 땔감을 삼을 수 있는 "종이"가 많다는 건 남아있는 사람들의 체온을 보호하고 그만큼 생존율을 더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영화 속 맨해튼이 잠긴 모습은 여전히 충격적이지만 사람들은 결국 도서관 건물에서 서로를 보살피며 생활하다가 구조대에게 발견되는데 뉴욕 공립 공원을 지나갈 때마다 괜히 <투모로우>가 생각나고, 위험한 상황엔 나도 꼭 도서관으로 대피해야겠다는 황당한(?)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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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분위기의 뉴욕 공립 공원. 그리스 신전이 떠오르는 외부 구조와 그 앞을 위엄있게 지키고 있는 사자상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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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이 아닌 일하러 또는 공부하러 왔음을 인증하면(?) 열람실에 입장할 수 있는데 잠깐이라도 들어가서 독서를 하거나, 논문을 읽거나, 일기를 쓰기 좋은 공간이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가 배경이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지, 또는 좋아하는 영화가 뉴욕이라 더 정이 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순서이든 내가 아끼는 영화들의 상당수가 뉴욕이라는 도시 그 자체를 촬영장으로 삼고 있다. 도심 속을 탐방하다가 떠오르는 영화가 있을 때마다 괜히 더 반가운 마음도 들고, 이번처럼 글을 쓸 영감을 받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는 영화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시트콤 속에서 등장하는 뉴욕에 대해서 다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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