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미국 시트콤 프렌즈가 주는 익숙한 편안함
2022년 겨울, 그 어느 때보다 긴 설 연휴였다. 평소처럼 KTX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는 대신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상경했다. 모처럼 본격적으로 정을 나눌 수 있는 명절 연휴인데도 당장 전 세계인을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 때문에 여유 있는 만남을 가지진 못했다. 그래도 실컷 먹고, 실컷 자고, "나의 리스트"에만 담아두었던 영화도 실컷 보고 몸 건강히 대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학부생 때는 서울에서 머물 수 있는 마지막 일분일초가 아까운 마음에 기차 또는 버스 시간을 늦출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늦추곤 했다. 하지만 대학원생이 되고 나서는 일요일 저녁에 다음 한 주 동안의 연구와 실험 계획을 미리 세우거나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쌓인 여행 독을 풀기 위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으며 주말의 끝자락을 보내는 루틴이 생겼다. 꽤나 효과적이고 낭만적인 시간이다.
대전집에 도착해서 엄마가 챙겨주신 반찬과 과일을 정리한 후 나는 이번 설 연휴의 마지막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국 시트콤 <프렌즈>로 장식했다. 따뜻한 둥굴레차 한 잔과 밀린 다이어리 정리, 그리고 이제는 백색소음과도 같은 익숙함과 재미까지 선사하는 프렌즈와 함께 아쉬움 가득한 연휴 마지막 밤을 보냈다.
프렌즈는 1994년에 시작해서 2004년까지 N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미국의 전설적인 시트콤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트콤 역사상 최고의 시트콤 드라마 중 하나로 손꼽히는 프렌즈는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여섯 명의 친구들의 삶과 우정 그리고 사랑을 다룬 훈훈하고 코믹한 시트콤이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 프렌즈의 나무 위키 페이지를 읽어보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실제 촬영은 캘리포니아 LA에 위치한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세트장에서 진행됐다고 한다. 괜한 배신감이(?) 밀려오는 건 기분 탓이겠지.) 1994년이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데 무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방영된 시트콤이다. 심지어 통상적으로는 먼저 방영된 시즌이 더 사랑받기 십상인데 프렌즈의 경우 최고 시청률과 수익 모두 시즌 8에서 터졌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지표다.
첫 방영 후 무려 28년이나 지났고 마지막 종영 역시 18년 전인 <프렌즈> 시리즈는 아직까지도 전 세계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과 넷플릭스 그리고 유튜브와 같은 OTT 서비스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프렌즈> 시리즈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것 역시 사실이겠지만 나는 2022년까지 큰 사랑을 내어주고 있는 애청자 중 한 명으로서 프렌즈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특별한 이유는 무수히 많다고 생각한다. 문득 연휴의 마지막과 평소 주말이나 퇴근 후 나의 휴식시간을 다채롭게 장식해주는 <프렌즈> 시리즈에 감사하며 내가 <프렌즈>를 이토록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끄적이고 싶어졌다.
첫 번째, <프렌즈>를 보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향수에 잠기게 된다. 1994년 해당 시리즈가 방영될 때 고등학생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귀게 된 친구들과 <프렌즈> 시리즈를 함께 정주행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각 시즌 그리고 에피소드 별 킬링 포인트와 하이라이트 대사, 또는 반전 (플롯 트위스트)에 대해 논의하며 <프렌즈>를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과 함께 - 우리끼리만 알 수 있는 '인사이드 조크 (inside joke)'를 나누기도 했다. 공부하기 바쁜 와중에 시트콤을 언제 챙겨 봤느냐 하면 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며 시트콤 에피소드를 하나씩 음미하며 시즌을 정주행 하곤 했다. 시트콤 특성상 한 에피소드가 20분밖에 안돼서 아주 가볍게(?)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끝마무리가 애매해서 다음 에피소드를 누르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요즘 시대의 넷플릭스 시리즈처럼 "다음 에피소드 바로보기"를 누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밤 열 한시 반까지 '열공'하고 누워서 시트콤 한 편을 보고 자는 것이 고등학생 시절 나의 루틴이 되었고 그 시간을 함께 해준 다양한 시트콤 중 <프렌즈> 시리즈가 단연 1등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패션이다. 패션계에 종사하고 있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이론이 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것. 하지만 이토록 유행의 돌고 도는 매력과 빈티지 패션의 아름다움을 잘 선보이고 있는 TV 시리즈는 드문 것 같다. (미국 드라마 <가십걸> 시리즈에서도 다양한 패션을 선보였지만 상류층 청년들이 주인공을 맡은 만큼 모든 패션은 다 명품이라 대중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1994년에 방영되었던 <프렌즈> 시즌1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면을 멈추고 감탄하게 되는데 주인공들의 매력적인 얼굴과 옷태도 큰 몫을 했겠지만 스타일링이 너무 예쁘다... 다 따라 하고 싶어지는 부분. 레이첼 그린의 패션이 가장 인기도 많았고 패션계에서 실제로 오마주 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 모니카 겔러의 패션을 좋아한다. 깔끔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을 좋아하고 짙은 머리 색깔에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그녀의 헤어 스타일 역시 정말 아름답다. 피비 부페이의 패션은 다소 파격적이고 강렬한 경우가 많지만 당시 유행했던 히피 스타일과 오히려 치렁치렁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어 피비의 원피스 룩을 따라 하고 싶었던 가을날도 참 많았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 말고 남성 캐릭터의 옷도 정말 매력 있다. 그중에서 (나의 기준) 최고는 챈들러 빙의 패션이라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는 유독 어색하고 인기도 없고 상처받기 싫어서 친구들에게 비꼬는 장난을 내뱉는 그이지만 패션 센스는 1등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 들어 큰 유행이 돌고 있는 조거 팬츠 스타일링과 하얀 양말에 스니커즈를 페어링 하는 센스를 보여주고, 맨투맨 안에 반드시 하얀 티셔츠를 챙겨 입는 단정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목 라인과 허리 라인에 살짝 보이는 하얀 티셔츠가 바로 킬링 포인트라고요!) 당장 주변에 챈들러처럼 옷 입는 사람을 발견하면 반할 것 같다. 이건 진심이다.
세 번째, 주인공의 매력과 그들의 성장 스토리를 관찰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열 개의 시즌을 이어가면서 모든 주인공은 큰 성장과정을 거치게 된다. 의사와 결혼하여 편안한(?) 가정주부의 삶을 꿈꾸던 레이첼은 본인의 결혼식에서 뛰쳐나와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프렌즈> 시리즈가 시작되는데 첫 번째 시즌에서는 모두가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지만 아직은 덜 자란 어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한 마디로 어른 구실을 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여섯 명의 친구들 간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이 세상 누구나 그렇듯 여섯 친구들 모두 말 못 할 불안정함 (insecurity)과 약점 (weakness) 그리고 결함 (flaw)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도 서로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고 아껴주는 친구들의 우정, 그리고 각자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하고, 이전보다 더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소통하는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큰 감동을 느끼게 한다. 처음 <프렌즈> 시리즈를 접할 때 나는 십 대의 끝자락을 보내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나 역시 이십 대 중후반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캐릭터들과 더 깊게 공감할 수 있게 됨을 느끼는 것 같다. 이렇게 극 중 인물들과 함께 같이 늙어가나 보다.
여기서 <프렌즈> 시리즈의 여섯 명의 친구들 중에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한 명의 캐릭터를 꼽아보자면 모니카 겔러일 것이다. 어렸을 땐 가장 예쁘고 인기도 많고 유쾌한 레이첼 그린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패션 센스 등 많은 것을 모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된 것이 나의 선천적인 성향만 고려했을 때 나는 모니카 겔러와 가장 유사한 것 같다. 모든지 깔끔하게 정돈된 환경을 중요시하고 좋아하며 스스로 항상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함께 하되 한 발자국 뒤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모니카가 좋다. 가끔씩 작은 일에도 크게 감동하지만 그와 동시에 별 일 아닌 데고 과하게 패닉 하는 피해망상적인 (paranoid)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 적이 꽤 많았다. 집안일을 좋아하고 친구들 모임에 있어 계획과 결단력을 발휘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내가 자취를 시작하고 집안일을 즐기는 모습과 밥 약속이 생길 때마다 메뉴 리더십을 발휘하는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이곤 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좀 짜증 나는(?) 캐릭터이기도 한데 난 그래도 모니카가 정말 매력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열정 (극 중에서는 사랑과 요리사로서의 커리어다)을 쫒으며 친구들과 함께 도시 생활을 영위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스트 프렌드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되고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는 그녀의 러브 스토리 역시 부럽게 느껴졌다. (모니카 만세, 몬들러 만세!)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유는 편안함이다. <프렌즈>는 나의 '컴포트 존 (comfort zone)'이다. 나에게 <프렌즈>는 그 어떤 시즌 어떤 에피소드를 틀든 다음 대사를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이토록 여러 번 전 시즌을 정주행 하며 충분히 익숙하고 뻔한 플롯 (plot)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렌즈>를 보며 빵빵 터지곤 한다. (이렇게 능청스럽게 대사를 치고 훌륭하게 슬랩스틱을 해내는 배우들도 대단하지만 전체적인 대사와 이야기를 구상해낸 작가들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지치지 않고 볼 때마다 웃기다.) 다른 시리즈나 영화도 편안하게 볼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볼 수도 있지만 나는 새로운 콘텐츠에 대해서는 내용이 무엇이든 제대로 각을 잡고 온전히 집중해서 보는 것을 좋아해서 그냥 틀어놓고 시간을 죽이기에는 익숙한 콘텐츠가 좋다. 그래서 영화도 본 영화를 또 보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모든 내용을 소화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새로운 시리즈물이 보고 싶을 땐 연휴나 휴가 시즌을 빌려 정주행 한다. 어떤 에피소드이든 익숙하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재미와 감동까지 약속해줄 수 있는 콘텐츠는 많지 않기 때문에 <프렌즈>는 언제나 나의 '고우 투(go-to)' 콘텐츠가 된 지 오래다.
이전에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공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프렌즈>를 시청했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UN에서 영어로 멋지게 연설을 해낸 BTS의 랩몬스터 (RM) 역시 토크쇼에 출연해 영어 실력의 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프렌즈>를 열심히 봤다고 답하곤 한다. 유쾌한 일상생활 영어 표현이 많은 만큼 <프렌즈>를 보면서 충분히 영어공부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프렌즈>에 대한 추억을 곱씹으며 캐릭터와의 유대감 보존을 위해 <프렌즈> 시리즈를 소비할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정주행 중이다. 시즌 4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 나의 덕후심을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도 않다. 최근에 백화점 레고 매장에서 <프렌즈> 특별판을 발견했는데 가격은 사악하지만 넓은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 소장용으로 반드시 갖고 싶은 아이템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레고 세트도 구매하고 여섯 명의 친구들이 나에게 선물하는 익숙한 편안함에 감사하며 질리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정주행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