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속에선 언제나 글감이 넘쳐났던 2월 말. 막상 차분하게 앉아 글을 쓸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했다. 소속된 연구실에서 순차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기도 했고 연구실 근처 통로 석면 제거 공사를 위해 출입문이 아주 막혀있기도 했다.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살아보자고 계획했던 2월 초의 내 포부가 무색하게도 2월은 그렇게 순삭 되었다. (루팡 당한 나의 2월...) 이토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시기가 오래 지속되고 자주 찾아오는 걸 보니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회의감과 소위 말하는 '슬럼프'가 계속되는 것 같은데, 최근에는 이런 슬럼프는 타파하는 것이 아닌 슬럼프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과의 수많은 대화를 바탕으로 나의 복잡 미묘한 생각이 어떻게 이러한 결론으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해 기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1월엔 살짝(?) 마음을 비우니 좀 더 편하게 지냈던 것 같다. 나는 작년 내내 나를 괴롭혔던 논문 리젝션 (rejection)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열심히 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워낙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 덕분에(?) 어느 정도 맡은 일을 끝내고 "내 할 일은 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있었기 때문에 정신건강은 어느 정도 보살피며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봤을 때 내가 하고 있는 연구의 진전이나 박사과정 동안 얻을 수 있는 성장의 기회는 모두 저버리고 있었다. 얼마 전 코딩 공부를 해보겠다고 선언했으나 혼자 하는 스터디에는 동기부여가 부족해서 매일 피곤했던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코딩 공부'는 우선순위 저 뒤편으로 밀리고 말았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설 연휴 이후에는 코로나19 확진자뿐만 아니라 공사 일정으로 인해 연구실 출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더욱이 시간 관리가 어려웠다. 끊임없는 타협과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주문을 외우며 스스로의 슬럼프를 너그럽게 인정했고 이를 직접 타파하긴 어려울 것이라 예측하며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날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그 논리 자체에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문제 (problem)를 발견하여 본인의 슬럼프를 인정했지만 "자연스럽게 해소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결국 문제 해결 (solution)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문제를 발견하고도 이에 대처하거나 풀어내기 위해 아무런 에너지가 남지 않은 무기력 (lethargy) 상태를 단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언제나 괜찮아질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일은 내가 단언컨대 지양하는 바인데 또다시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었고 이토록 무기력한 감정은 나의 태도를 지배하고 말았다. 자기 주도적인 성장을 외쳐왔던 나의 모습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또다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시기가 찾아오고 말았다.
사실 스스로의 슬럼프 상태를 발견하고 잠시 휴식의 시기를 보내는 것에는 해로울 것이 없다. 인생은 100미터 질주가 아닌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하여 하루씩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달릴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기력한 상태로 그리 바쁘지 않은 시기가 지속되다 보면 마음에 해로운 번뇌가 가득 차게 된다. 어제보단 오늘, 내일보단 오늘에 집중해야 할 소중한 시간에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내 마음속을 지배하게 된다. 또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시간에 상대방의 불행을 연료 삼아 나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안타까운 일을 반복하게 된다. 내가 맡은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완성도 있게 멋지게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곱게 접어 날려버리고 어떻게 하면 나의 노력 부족이 타인과 비교했을 때도 티가 덜 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 쓰고 나니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 번 뼈저리게 느껴진다. 좁디 좁아지는 마음엔 한 없이 커다란 비겁함만 남게 된다.
그리고 앞서 비유한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격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사실 마라토너들은 아주 멈추지 않는다. 마라톤은 우사인 볼트 선수처럼 질주하는 종목이야 아니겠지만 100미터의 421배, 42.195 킬로미터를 완주해야 하는 초 장거리 달리기 종목이다. 그 거리가 가장 길기 때문에 우리네의 "인생"을 대표하여 비교대상이 되곤 한다. 마라톤에 참가하면 오랜 시간 동안 잘 달려서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더 복잡한 것을 사실이지만 선수들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보면 나 역시 속도를 줄이되 급속도로 브레이크를 밟거나 독일의 아우토반 (autobahn)을 질주하듯 높은 속도로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피해야 할 것 같다. (괜히 엔진만 고장 날 뿐 오히려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슬럼프 시기를 맞이하여도 굳건히 내가 갈 길을 갈 수 있으려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아닌 속도 조절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나에게 맞는 단기 목표 설정과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건강한 습관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첫 번째 단기 목표에서 중요한 점은 "나에게 맞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연구실의 예를 들어보면 구성원 A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어서 그 공부를 따라 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또는 구성원 B가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새벽 한 시에 퇴근한다고 해서 내가 연구실에서 16시간을 머무를 이유도 없다. 물론 뭐라도 따라 하다 보면 배우는 점이 있고 연구실에서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을 늘려본다면 매 순간 효율적일 수야 없겠지만 칼퇴근하는 지금의 나보단 더 많은 일을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맞는" 출퇴근 스케줄과 매일의 To-do list 설정이 중요한 것 같다. 대학원 생활 중에도 예상치 못한 추가 업무가 생기기도 하고 코스워크 (coursework)를 수강하는 학기에는 더 바빠지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하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고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앞서 두 번째로 언급했던 속도 조절 방법은 바로 내가 세운 목표를 이행할 수 있는 건강한 습관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본 방법들을 공유하자면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볼까 고민 중이다. 오전엔 실험보단 논문 공부를 한다든지 또는 내가 연구실에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나만의 루틴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루틴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일을 더 했고 덜 했고를 따져보기도 전에 충분히 많은 일을 일궈냈을 것이다. 이런 루틴과 정해둔 시간을 알차게 보내면서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학위 과정을 밟고 싶다. 사실 박사과정생으로서는 주어진 일을 좀 더 잘 해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게놈 분석이든 RNA 시퀀싱 분석이든, R을 사용하여 그래프를 그리는 능력이든 다양한 생물정보학 실험이나 분석 도구를 다룰 줄 아는 그 실력과 새로 배우고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그 용기야 말로 박사학위를 받을 만한 자격을 얻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자격은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열정을 찾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날이 많았다. 나 빼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속해 있는 그룹에 자긍심과 소속감을 느끼며 열정적으로 맡은 일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양한 친구들과 선배들, 그리고 미디어 속 접할 수 있는 인터뷰를 참고하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나도 이제 알긴 안다.) 하지만 열정은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해봐야 생긴다. 우리는 흔히 인과관계의 순서를 가리기 어려울 때 "Chicken and egg problem (닭과 계란 문제)"라고 표현을 하는데 열정과 노력이야 말로 이런 chicken and egg 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연느님, 김연아 선수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기적은 자신의 의지이다. 바라기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이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이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해왔었다. 하지만 욕심은 많은 탓에 성취를 원했고 계속해서 멋진 모습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그에 대한 확신과 표식을 갈망했다. 하지만 바라기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모순된 마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기부여에만 의존하여 본인의 의욕이 솟구쳐 오를 때까지 아무런 노력 없이 때를 기다리다 보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 일단 해야 한다. 해봐야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고 나의 열정이든 회의든, 뭐라도 시작하고 꾸준히 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좀 더 열심히 해봐야 할 것 같다. 당장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분야이지만 노력을 위한 루틴을 디자인하는 일은 적성에 꽤나 잘 맞기 때문에 어떻게든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유독 짧고 빨리 지나갔던 2월에 비해 3월은 일수도 많고 연구실 발표 등 이런저런 이벤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주 멈춰 서지 말고 일단 해보자는 다짐을 기억하고 건강한 3월을 보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