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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Mar 07. 2022

단잠

"잘 자요"라는 인사가 그토록 낭만적인 이유

요즘 잠은 잘 자니?


약 2년 전 불면증이 심했던 시기를 보내고 있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인사말은 바로 내 수면의 질에 대한 안부 인사였다. 우리는 보통 서로의 안녕에 대해 많은 인사말을 주고받지만 상대방의 수면의 질 (sleep quality)에 대한 언급은 자주 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도 아닌데 "잘 잤냐"라고 물어보기도 애매하고 아직 잘 시간도 한참 더 남았는데 무턱대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어색한다. 당장 대화를 종결시키고 싶은 건가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조심해서 인사를 나누는 것 같다.


아무튼 잠은 안녕히 자고 있냐는 안부 인사를 받았던 당시 "헉"하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잘 못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족하고 얕은 잠 때문에 매일 피곤하고 불안한 일상을 살고 있었는데 이를 들킨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이토록 세심한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상대방의 섬세함에 놀라기도 했다. (성시경이 오랜 시간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끝 인사가 "잘 자요"였다. 괜히 그토록 낭만적이었던 게 아니다.) 그렇게 나는 사실을 잘 못 자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더 진솔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후로 나 역시 상대방의 안위가 걱정되거나 오랜만에 고민상담을 청해 오는 친구들 또는 후배들에게 그들의 수면 상태에 대한 안부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그렇게 나만의 데이터를 축적하며 수면의 질과 건강 상태의 상관관계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잠을 정말 좋아한다. 잠을 자는 일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고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한참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할 땐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무려 2년이나 끊기도 했다. (작년에 자취를 시작하며 수면 패턴이 안정화되자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요즘 다시없어서 못 마시는 걸 보면 나의 의지가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최근엔 살이 많이 쪄서 이런 집념을 식단관리와 운동에 쏟고 싶은데 이건 다음 글에서 논의해볼 계획이다.) 아무리 커피의 맛이 그리고 워도 밤 잠을 설치게 되는, 설쳐야 하는 새벽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예 억지로 피곤함과 졸림을 유도하기 위해 카페인이 강한 커피 섭취를 중단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나에게 잠은 중요하고 양질의 수면을 통해 하루의 피로와 번뇌를 씻어내는 행위는 매우 고귀한 일이라 여기고 있다.

양질의 수면을 위해 열심히 포근하게 가꾸고 있는 노란색 침구 세트. 침대 옆 협탁은 항상 갖고 싶었던 가구인데 자취하면서 장만하고 요긴하게 사용 중이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잠을 엄청 많이 자는 편은 아니다. 요즘 기준 ("요즘"이라 하면 자취 후 수면 패턴에 안정화를 거친 후) 7-8시간 정도 자는 편인데 11시 반에서 12시쯤 잠자리에 들면 다음날 7시쯤 눈을 뜨는 정도의 수면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인, 심지어 대학원생 치고 이 정도면 엄청 많이 자는 건가 싶긴 한데 이 정도면 건강한 삶을 위해 권장된 수면 시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낮잠도 잘 안 잔다. 연구실에 출근해서는 낮잠을 자기 위해 마땅한 시설이나 공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가 뜨고 난 이후에는 오전 그리고 오후 시간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낮잠을 결심하진 않는다. 주말에도 약속이 없거나 여유로운 날에는 식곤증을 친구 삼아 낮잠을 자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내 의지로 낮잠을 청한 것은 아니다, 점심으로 먹은 탄수화물이 열심히 일 했을 뿐. 잠들 수 있는 환경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라 이동시간에도 잠을 실컷 자는 편도 아니고, 아무튼 나는 잠을 좋아하지만 적당한 수면 시간을 지키는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탈 때도 나는 잠을 잘 청하지 못한다. 코로나 19 직전 19년도 연말에 뉴질랜드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책을 읽거나 다이어리를 쓰거나 영화를 보다가 기내식 소식이 들려오면 굉장히 반가워한다. 사진으로 보니까 기내식이 더 그리워진다.

잠에 진심이지 않은 친구들과의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나는 내가 잠드는 시간대에 굉장히 집착한다는 점이다. 나는 열두 시 이후까지 깨어있는 게 싫다. 좀 더 과장해서 이야기해보자면 해가 떨어졌다면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겨울엔 해가 유독 더 짧아져서 한겨울엔 오후 다섯 시 반쯤 굉장히 어둑어둑해지곤 하는데 이럴 땐 고민하지 말고 대자연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인간의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한다. 감히 해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때부터 시작되는 시끌벅쩍한 '나이트 라이프 (Night life)'도 취향에 맞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새벽까지 맥주잔을 기울이며 학교 근처 갑천을 산책하던 날들도 있었다. (아 젊음이여~) 하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그리고 다음날 출근할 대학원 연구실이 생긴 이후에는 더더욱 이런 밤 약속 참석에 응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문턱 (threshold) 자체가 워낙 높아져서 진짜 웬만해서는 새벽까지 이어질 약속엔 응하지 않는다. 단언컨대 난 자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는 김 (meme)이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나를 위한 시간을 만끽해보라는 "미라클 모닝" 후기 글인데 유일한 단점이 공감된다ㅋㅋㅋ

나는 정말 "자야 해서"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데 이런 거절이 너무 자주 지속되다 보면 상대방이 슬슬 오해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왜냐면 다 같이 함께 할 수 있는 친목 자리에 "잠"을 이유로 참석을 꺼리는 모습은 자칫 함께 하고 싶지 않나 아무런 핑계나 내뱉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고마워질 때도 있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밤 10시엔 집에 가야 하고, 마시던 술과 배불리 먹던 치킨을 정리하고 자리를 나서야 할 타이밍을 국가가 정해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어도 내가 졸리고 피곤하면 그만큼의 에너지와 재미를 잃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좀 더 좋은 컨디션에 몸과 마음이 또렷할 때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는 내 진심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 진심이 닿길 온 마음 다해 바라본다.


그런데 사실 수면 시간을 지키기 위해 거절하는 약속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나의 수면 패턴과 밤 보단 아침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이해해주는 친구들이 주변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만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쉽게 졸리고 당장 잠을 청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날엔 정말 고통스럽다는 점이다. 지금 기억에는 대학생 때가 딱 그랬다. 고등학생 때까지도 내가 디자인한 하루 일과로 11시 반까지 공부를 마치고 마지막 삼십 분 정도는 좋아하는 시트콤을 한 편 시청할 정도의 여유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는 공부를 따라가는 게 많이 힘들었다. 선행학습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갖 수학과 물리가 잔뜩 들어있는 공과대학 수업은 아무리 성실하게 수업자료를 예복 습해도 시험 기간엔 도무지 문제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계속했는데 이럴 땐 초저녁부터 잠이 많은 스스로의 성향이 저주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카페인 내성이 없는 편인데도 저녁 여덟 시에 진한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며 깨어있으려 노력했고 그 시간 동안 공부해보려고 아등바등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결국 나만의 루틴을 찾으며 문제를 해결했던 것 같다. 룸메이트 친구가 새벽 세 시까지 공부한다고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대학생 때 이후로 (그것도 학부 3학년 정도까지만) 졸린데도 두 눈을 부릅뜨고 할 일을 해내려고 노력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원래는 대학원이 더 어렵고 힘들고 할 일이 태산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삼 년 전부터 극강의(?) 여유를 찾아낸 것 같기도... 그래도 잠이 중요한데 이를 포기할 만큼 강한 열정을 느끼는 게 과연 건강한 삶일까 싶기도 해서, 당장은 꾸준히 그래 왔던 것처럼 잠을 더 중요시하면서 하루씩 살아갈 것 같다.

괜히 잠이 안 온다는 심술로 죄 없는 아메리카노 탓만 했구나 싶다. 앞으로 아침/오전 시간에 한 잔 정도는 실컷 마셔야지, 모든 향과 맛을 음미하면서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약 2년 전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이걸 불면증이라고 칭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잠자리에 누우면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이런 시간이 2시간 이상 계속됐다. 잠에서 깨어나는 일도 잦아서 수면의 깊이가 굉장히 얕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래서 차라리 몸을 피곤하게 하자! 는 마음에 커피도 안 마시고 운동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나름 2년 동안 커피도 끊고 자취를 시작하며 몸과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이런 문제를 해결했으나 고질적인 문제의 원인은 사실 커피가 아니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수면의 질을 저해하는 가장 악질의 범인은 바로 "번뇌"다. 번뇌로 가득 찬 머릿속이 카페인에 반응하는 내 몸의 체세포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연구실에서 좀 신경 쓰이는 일과 인물이 있었는데 당장 내가 피해를 받고 있는 상황도, 그토록 온 마음 담아 악영향을 받을 일도 아니었는데 잠까지 설치게 되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생각이 악순환의 꼬리를 물게 된다. 작은 일에 신경이 쓰여 잠까지 이루지 못하는 본인에 실망하여 내 머릿속 번뇌는 더욱 살집을 키우고 내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일은 잘 보내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크고 작은 타격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력 (resilience)를 갖추는 것이야 말로 진짜 실력자로 거듭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갈길을 갈 수 있는 용기와 여유, 이것이야 말로 내가 단잠에 빠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번뇌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서울 본가에 가면 유독 깊은 잠에 빠지곤 한다. 물론 집에서도 일찍 일어나고 온 가족이 아침 일곱 시 반 또는 여덟 시에 기상하여 아침밥을 차려먹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하지만 잠의 깊이는 비교할 수 없다. 특히 여유로운 주말에 한 번 낮잠을 자기 시작하면 기본 세 시간 정도는 잠에 푹 빠지는 것 같다. 집에만 오면 나도 모르게 '컴포트 존 (comfort zone)'을 인식하여 긴장했던 순간들로부터 멀어져서 무장해제하여 단잠에 빠지는 것 같다. 집이 달콤한 또 다른 이유다.

마침 읽고 있는 책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도 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꿈을 제대로 수령하여 즐기기 위해선 최대한 깊은 잠을 자며 컨디션 조절을 해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아이유가 2017년 발매했던 히트곡 중 <밤 편지>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단잠을 바라 주는 정말 예쁜 소망이 담긴 곡이라 대중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는데 유 퀴즈에 출연했던 아이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제로 잠에 들기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담긴 사랑고백은 바로 그의 수명의 안녕을 바라 주는 일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정말 예쁜 마음이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띄울게요. 좋은 꿈 이길 바래요.
2017년 발매된 아이유의 <밤 편지> 지금보다 5년 전 모습인데 굉장히 아기 같은 모습이다. 함께 발매됐던 <팔레트> 곡을 유독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자야 할 땐 자자. 그리고 푹 자기 위해 노력하자. 번뇌든 카페인이든 우리의 단잠을 방해하는 이 사회의 수많은 스트레스들로부터 도망쳐서 나 역시 모두가 달콤한 꿈과 함께 피로가 싹 풀리는 잠을 청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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