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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Oct 16. 2024

청담동 스펙트럼

넓고 넓은 직업 스펙트럼


에너지가 높은 곳






“이 동네는 스펙트럼이 넓어요.”

아이들이 달리기 경주를 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솜이엄마가 말한다. 이날은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운동회 날이라 아이들과 학부모들로 운동장이 인산인해였다. 학교에서 안내해준 시간에 도착했는데 이미 운동장 계단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겨우 구석자리를 찾아 앉고 아는 사람이 왔는지 한번 둘러본다. 누군가 어깨를 툭 쳐서 돌아보니 솜이엄마다.      

    

솜이네 엄마아빠와 나란히 앉아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러 가지 이슈로 학교에서는 학부모 출입을 엄하게 통제하고 있는데, 간만에 학부모 참관 행사라서 그런지 아이들도 들뜬 모습이다. 모래알 같은 아이들 중에 겨우 우리 아이를 찾고 열심히 카메라에 아이 모습을 담는다. 한참동안 분주히 촬영을 하고 계단에 앉아 목을 축이는데 부모들이 눈에 들어온다.       

 

청담동에 위치한 이 초등학교는 부모들의 직업 범위가 넓다. 대한민국 전체를 파악할 순 없지만 아마도 부모들이 종사하는 산업군과 직업의 개수가 가장 많은 곳이 아닐까 싶다. 마포나 잠실이면 대기업 맞벌이가 많고 여의도는 금융권 종사자가 많지만 청담동은 한 카테고리로 직업군이 모아지질 않는다. 내가 만난 부모들만 해도 금융, 법조, 의료, 학원, 예술계 등등 종사업계가 다양하고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두세명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부모 직업의 다양성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한번은 학교에서 폭력사건이 발생해서 피해자와 가해자 부모들이 만났다. 피해자 부모는 사과를 요구했지만 가해자 부모는 아이들끼리 놀다가 그런 일이라며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가해자가 전학을 갔다. 바로 피해자 부모직업이 법조인이고 가해자 부모는 특정사업에 종사했기 때문. 서로 직업을 드러내진 않았겠지만 우연이든 필연이든 가해자쪽이 피해자네 직업을 알게 됐을거란 추정한다. (법조인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업이 있더라...)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서 그런지 학부모들끼리 만나면 굉장히 조심한다. 특히 청담동 학부모들의 특징은 외모만 보고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는다. 수수한 스타일에 순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잘빠진 몸매와 수려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 해서 딱히 우러러 보지 않는다. 왜냐면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기 때문.      


배 나온 동네 아저씨 같지만 권력자기도 하고 민낯에 검정 후드를 뒤집어 쓰고 다니는데 알고 보면 유명 연예인인 경우도 많으니 자연적으로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구찌, 샤넬, 버버리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 플래그샵과 가장 가까운 생활권에서 반대급부의 일들이 벌어진다는 점이 조금 아이러니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 동네 사는 게 가끔은 재밌기도 하다. 실체를 알면 다들 배신감을 느낄 만한 스펙(?)으로 붙어살고 있지만 여기서 비슷한 척 숨어산다.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는 윌리를 찾아라의 윌리처럼 ‘나 찾아봐라’라는 마음으로 산다. 어차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도 나의 직업이나 배경에 대해 묻지 않는다. 가끔은 너무 말해주고 싶은데 (저희는 대기업 다니는 맞벌이고요, 제 본가는 지방 시골이고요, 저희는 님들처럼 부자가 아니에요!) 말할 기회가 도저히 없다.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을 본다. 부모가 대통령이건 뭐건 간에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논다. 내가 어린 시절 학부모님들, 어쩌면 다른 동네에서는 ‘00네 부모님이 00(직업)이라고 하니까, 너 걔랑 놀지마!’라고 말한다. 청담동 초등학교 생활에서는 그런 말이 거의 불가능하다. 직업을 구분을 짓고 한 범주안으로 모으려고 하다보면 놀 친구가 남아있지 않을 거다. 서로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큰 이곳에서 아이들은 모두 친구로 여기며 학교에서만큼은 평등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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