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청담동 이야기를 더 해볼까
취향을 숨기고 싶을 땐
색을 빼고 태를 낸다
최근 제주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태교여행으로 다녀온 이후 처음이니 9년 만이었다. 근 10년 만에 간 제주는 여전히 장관이었다. 유채꽃 사이로 부서지는 파도는 아름다웠고, 켜켜이 쌓인 돌담과 햇살이 어우러지는 지점은 한 폭의 그림같아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3박4일의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날, 사진정리를 위해 클라우드를 보는데 문득 9년 전 제주사진이 궁금해졌다. 스크롤을 한참 올려 당도한 곳에는 부푼 배를 가만히 매만지며 녹차밭에 서있는 20대 후반의 내 모습이 있었다. 앳된 날들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려는데, 뭔가 작은 변화가 느껴진다. 사진 속 옷 색깔이 너무 알록달록 했기 때문.
지금 내 옷장을 열어보면 흰색, 아이보리, 그레이, 검정색 옷들 뿐이다. 9년 전만 해도 내 옷장은 박시한 후드나 그래피티를 옮겨놓은 듯한 화려한 패턴의 옷들이 많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내 성향, 취향이 모두 변했을 수도 있지만 단물 빠지듯 옷장에서 색깔이 다 빠져버렸다. 이건 다 청담동 때문이다.
내 취향은 바뀐게 아니다. 여전히 원색이나 컬러감이 강한 옷들을 좋아한다. 다만, 내 취향을 유지하면 동네에서 너무 눈에 띈다. 청담 삼성 압구정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눈에 안 띄기 위한 생존전략으로 무채색 옷들을 골랐다. 나만의 취향은 좀 숨긴채, 왜냐면 내 취향에 자신이 없으니까.
옷에 색이 빠졌다고 해서 내가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처연해진 건 아니다. 색감은 뺐지만 태는 더 내는 스타일링을 하고 있다. 이런 룩을 요즘 ‘올드머니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브랜드 로고나 디자인이 화려한 것들 보다는 잘 관리된 몸을 드러내는 원단이 좋은 옷들을 입는 것. 이게 보통 이동네 사람들의 겉모습이다.
색이 아니라 태를 보여준다.
모델들을 잘 보면, 일상생활에서 과한 옷을 잘 입지 않는다. 몸매에 자신이 있다보니 오히려 몸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는 색감의 옷보다는 단촐한 옷차림을 선호한다. 건강관리와 생활습관에 신경쓰는 사람들은 날씬하고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최대한 편하되 사람에게 시선이 갈수 있는 옷차림을 한다.
이사를 항상 고민하는 나지만 (아직도 빈부격차는 적응 못함) 어떻게 저쩧게 이 동네 붙어서 잘 살고 있다. 조금 자만한 소리일 수 있지만, 이젠 겉으로만 보면 외지인 느낌은 별로 안 나는 것 같다. 처음에 이사와서 경비아저씨나 슈퍼 아주머니에게 말도 못 걸었던 쫄보 시절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겉 모습은 비슷해졌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서부터 청담인들이 쌓아온 문화자본의 벽은 높다는 걸 느낀다. 그들이 각자의 예술적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저녁을 먹는 식사 에티켓을 볼 때 문화자본력이 높은 사람들임을 체감한다. 가장 장벽을 느꼈을 때는 감정적인 대화를 나눌 때 놀라운 감정통제를 해내는 모습을 볼 때다. 바로 앞서서 같은 화제로 흥분해서 열변을 토했던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청담동 사람들보다 내가 딱 한 개 나은 게 있는데 바로 어휘력이다. 고급 어휘나 예술의 언어는 잘 모르지만, 세상에 떠다니는 다양하고 센스있는 어휘를 많이 알고 있어 대화를 할 때 강점이 될 때가 많다. 이는 내가 인문학이나 소설책을 많이 읽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청담동 사람들에게 섞여 사는 비결이 겨우 독서라는 게 어이없지만 물려받은 문화자본이 없는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후천적 생산재는 다독으로 인한 어휘력 뿐 인 것 같다.
10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아직도 쫄아산다. 길다가 누굴 만날지 무섭고, 진짜 나를 알아차릴 까봐 여전히 두렵다. 다이나믹한 에피소드와 널뛰는 감정을 담은 청담동 에피소드는 9월에 출간되는 책에 왕창 담아뒀다. 곧 세상에 나올 예정이니 독자분들께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지금 글쓰는 시간이 자정정도 인데, 앞동에 불켜진 세대가 없다.
이 동네 사람들은 잠도 일찍 자네.
ps. 본문 이미지 출처는 DE MARS (demar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