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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나 Mar 04. 2020

나이 많은 동료와 일할 수 있을까

나의 나이 라이프


 



* 해당 글은 나이이즘 Vol.2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종종 구직 사이트를 뒤적여본다. 새로운 일감이 필요할 때, 구직시장 동향은 어떤가 궁금할 때, 기타 등등의 이유로. 하지만 경력 10년의 30대 후반 구직자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놓고 지원자격에 1985년 이후 출생자, 25세~35세 등으로 출생연도와 나이 제한을 명시하는 곳도 수두룩하다. 필요한 경력과 직급자를 찾는 일이야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나이를 대놓고 명시하는 경우는 직·간접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 팀 내 직원들의 나이와 직급 서열이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상사보다 나이 많은 하급자를 뽑을 수 없으니까. 


나이 차별로 똘똘 뭉친 나라라며 분개하지만 나 역시 이력서를 검토하는 입장이었을 때 나이 많은 지원자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편하게 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애초에 나이를 이토록 중시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상사라는 이유로 하급자를 ‘갈구는’ 게 용인되는 상명하복의 기업문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나이가 어리면 공사를 막론하고 ‘아랫사람’으로 부리는 문화가 결국 나이 많은 하급자를 꺼리는 또다른 차별을 만들어낸 셈이다. 나이 그게 뭐라고. 고작 몇 살 어리고 많고 그게 뭐라고. 영자 언니가 말했듯이 나이는 노력하지 않아도 거저 먹는 건데 말이다. 


그런데 만약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만큼이 아니라 수십 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면 어떨까. 30대 CEO와 70대 인턴사원이 등장하는 영화 <인턴>이 현실이 된다면? 그때도 나는 나이 많은 하급자를 불편해하는 것이 우리 영혼에 흐르는 나이 차별의 DNA 탓이라고 명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인턴>의 한 장면.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많이...


몇년 전에 다니던 회사에는 60살이 훌쩍 넘은 팀원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직급으로 따지면 그보다 상급자였다. 그는 대체로 주어진 일은 성실하게 했지만 일하는 감각이나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뒤처지는 부분이 많았다. 메신저 앱을 깔 수 없는 2G폰을 사용하는 탓에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있었고, 그가 가져오는 결과물은 통속적 표현으로 ‘올드’해서 그대로 컨펌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당시 팀에서 ‘트렌디함’이 중요한 콘텐츠를 개발하는 중이었기에 그의 ‘트렌디하지 못함’은 더욱 도드라졌다. 결국 그가 가져온 결과물을 매번 수정해야 했고, 덕분에 정작 내 업무를 제때 하지 못해 야근하는 경우도 여러 날이었다. 절로 그를 보는 시선이 고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온전하게 그를 미워하기도 어려웠다. 한 번 더 손을 봐야하는 그의 작업물이나, 팀원들이 함께 보는 서류를 침 묻혀 넘기는 모습을 볼 때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에게서 자꾸만 미래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찌어찌 같은 분야에서 일하며 먹고 살다가 변화에 적응하는 순발력과 학습력이 떨어지는 나이가 되면, 나는 산뜻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그가 짠하고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그 시절이 과거완료형이 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했을까. 나이 많은 직원은 역시 팀에 마이너스일 수밖에 없는 걸까. 나이 많은 하급자를 초라하게 보는 건 내 안의 편견일까 자연스러움일까. 손이 건조해지는 나이라서 문서에 침을 묻히는 그를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골무를 선물하는 센스를 발휘할 수는 없었을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답은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영화 <인턴>의 한 장면. 영화돠 현실은 다르다. 많이... 그럼에도.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상상 초월의 상식 밖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온갖 뒷말을 옮겨 나르며 팀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 동료는 어떻게 되든 자신만 손해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으로 뭉친 사람도 있다. 실무도 책임도 아래 직원에게 떠넘기는 무능력한 상사는 넘쳐나고, 갑을관계를 내세워 성희롱을 일삼는 놈들은 끊임없이 출몰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어떤 X였을지 모를 일이고. 하지만 대부분 개인의 인성 문제로 여겼다. "노처녀 히스테리 부린다"라며 여자 상사를 폄훼하는 말에는 “그런 집단화는 위험하다”고 발끈하고, “요즘 애들은 정신력이 약해”라는 말에는 “그런 말 하기 시작하면 꼰대”라고 응수하며 싸잡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상식밖 행동을 하는 X들을 실컷 욕하다가도, 결국 그런 횡포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직이라는 구조의 문제라며 열을 올릴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직원 앞에는 그토록 쉽게 ‘나이가 많아서’라는 이유를 달았을까. ‘노인’이라는 집단으로 간편하게 라벨링하면서도 그가 지닌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라 여긴 나의 모순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가 지닌 단점 중에는 분명 새로운 업무 방식 습득이 더디다거나 하는, 나이를 떼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개인의 특성이 아닌 나이 문제라면 더더욱 나이를 문제 삼아 그를 비난하기는 찜찜해진다. 우리는 누구나 나이를 먹고, 자본가가 되지 않는 이상 최대한 오래오래 일해야할 테니까(젠장). 만약 그에게 노년층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떨까. 재직자를 위한 직무 교육이나 적절한 이직 기회가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애초에 수십 년을 일하고도 노후를 걱정해야하는 사회가 문제 아닐까. 구조와 환경의 변화는 멀고, 개인을 향한 미움은 언제나 쉽게 손에 잡힌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를 기꺼운 마음으로 대할 자신은 없다. 퇴근시간을 지체시키는 동료를 달가워하기엔 나는 너무나 속인이다. 내게는 내 심신을 피로하게 하는 타인을 싫어할 자유도 있다. 다만 생각한다. 나이를 지우고, 성별을 지우고, 계급을 지우고 타인을 고유한 존재로 대하는 연습을 조금은 더 해야겠다고.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혐오와 배제의 길목으로 쉽게 들어서지는 말자고. 


그래야 시간이 지나 최신 기계 이용법을 더듬더듬 배워야하는 날이 올 때, 젊은 사람들에게 누가 되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때, 그런 나 자신을 초라하게는 느낄지언정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


write 박의나

프리랜스 에디터이자 글 노동자. 나이문화와 나이듦을 화두로 한 독립잡지 <나이이즘>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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