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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나 May 31. 2020

엄마는 뭘 좋아해?

나의 나이 라이프




최근 부모님이 사시는 본가에 머물다 왔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섰는데 싱크대 틈새에 낀 물 때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인가 집에 오면 싱크대나 화장실에 묻어 있는 생활의 흔적들을 발견하곤 한다. 엄마는 참 바지런하고 깔끔한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헐렁하고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나는 늘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당연히 집은 늘 깔끔하고 깨끗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전 같지 않은 모습들을 본다. 노안 때문에 작은 먼지나 물 때 등이 잘 보이지 않는 다. 설거지를 하면서 물때를 닦아 냈다. 며칠 후에는 샤워를 하면서 화장실도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자연스러운 거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슬퍼졌다.

     

언젠가 엄마가 이런 얘기한 적이 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생전 음식 한 번 흘리는 법이 없는 깔끔한 분이었는데, 음식을 자꾸 흘리는 걸 보면서 진짜 나이가 드셨구나 싶어서 슬펐다고. 시간의 잔인한 유한함을 몸에서 나타나는 화를 통해서 체감하게 될 때, 엄마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나는 어떠한 기분을 느껴야하나.     


노안은 어쩌면 사소한 문제다. 엄마는 십 수년전부터 몸이 아프다. 입원을 하거나 큰 수술을 할 종류의 질병은 아니지만 치료가 되지 않는, 만성적이고 이름을 붙이 어려운 통증. 아프면서 엄마는 몸도 마음도 많이 노쇠했다. 고작해야 몇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다보니, 그런 엄마의 쇠락은 눈에 더 잘 띄었다.


글자그대로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결혼생활. 아빠가 나름 번듯한 직장인으로 명함을 갖고 일하는 동안 엄마는 그럴듯한 직업인으로 불러주지 않는 여러 부업을 전전했다. 그 돈으로 나를 먹이고 입히고 학원도 보냈다. 가사노동과 나를 키우는 일도 오롯히 그녀의 몫이었다.


아등바등 살던 세월이 지나고 겨우 숨을 좀 돌릴만하다 싶졌을 때, 엄마의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예전보다는 여유로워진 생활 속에서 노후를 즐기기 좋다는 시기. 단한 호사까진 아닐지언정 그녀도 그런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하지만 친구들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동안(물론 코로나 전의 일이다) 장거리 이동이 힘겨운 엄마는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 시절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하나 남부러울 것 없이 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 여전히 몸에 밴 습관대로 근검절약을 하며 산다. 하나뿐인 딸이 결혼하지 않고 사는 탓에 자식보다 더 귀엽다는 손자를 보는 재미도 없다. 다 떠나서 좋은 것을 누리고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어 보였다. 요즘은 좀 나아진 듯 하지만, 한참 아플 때의 엄마는 몸이 괴롭다보니 뭘 하자고 해도, 뭘 먹자고 해도 심드렁했다.     


그런 엄마에게 몸 편하게 갈 수 있는 일등석 티켓을 턱턱 사줄 여력도, 그렇다고 귀여운 손자를 안겨줄 생각도 없는 나는 어쩐지 늘 마음 한구석이 죄인같다. 자주 연락이라도 해야지, 집에 한 번이라도 더 가야지, 마음이라도 살갑게 표현해야지 마음 먹지만 그런 마음은 금새 바쁜 일상에 희석되고 만다


그러다가 최근 엄마에게 뮤지컬 공연을 예매해주었다. 무언가를 사주겠다고 하면 일단은 ‘그거 비쌀텐데’ '필요 없다'라며 거절하는 내색을 보이곤 하던 엄마가 웬일인지 단번에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전,  공연을 보러갔던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너무 좋구나. 다음에 또 보여줄래?’

     

엄마는 내가 뭘 해줘도 크게 감응하지 않는 사람이다. 선물을 안기거나 나름 고심해서 맛있는 식당을 가도 어딘지 영혼 없이 ‘좋다’ ‘고맙다’라고 하는 느낌이 들어 김이 샜다. 먼저 뭔가를 갖고 싶거나 하고 싶다며 나를 조르는 법도 거의 없다. 그런 엄마가 공연이 너무 좋았다고, 또 보여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니 기쁘면서도 미안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게 뭔지 참 관심이 없었구나, 아니 알면서도 너무 무심했구나.

    

요즘 일감이 별로 없다. 프리랜서의 일이란 원래 보릿고개와 수확기를 넘나드는 법이긴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장기적으로 이어지다보니 불안감이 커지긴 한다. 그러다가 페이도 얼마 되지 않고 이력에 보탬도 되지 않을, 심정으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 하나가 들어왔다. ‘지금 일 가릴 때인가’ 싶지만 그래도 내키지가 않았다. 그런데 엄마의 메시지를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하고 싶지 않은 게 대수인가. 돈 벌어서 다음에는 엄마가 요즘 재미있게 본다는 팬텀싱어 공연을 보여줘야지. 아,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라 피켓팅(피튀기는 티켓팅 전쟁)에 성공할 수 있으냐가 관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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