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행시간이 24(+α) 시간인 버스가 있다는 걸 아는가? 나는 이번에 알았다. 완전히 피부로, 그리고 당연하게도 천천히. 그것은 루앙프라방에서 출발해 라오스-베트남 국경을 넘어 하노이로 향하는 버스다. 이 세상에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고난의 버스가 있겠지ㅡ당연히 있을 것 같다ㅡ만, 지금의 나로서 꼬박 하루가 걸리는 버스는 충분히 충격적인 여정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여정이 이번 여행의 테마를 암시한 듯하다.
루앙프라방에서 하노이로 향하는 국경버스는 목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6시에 출발한다. 다섯 시에 미리 도착해 앉아 있으니 삼삼오오 외곽에 위치한 터미널로 들어서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하나같이 배낭을 메고 있고, 당연히(?) 캐리어를 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캐리어와 배낭엔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출발 10분 전이 되자 어디선가 짙은 남색의 단체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 네댓 명이 나타난다. 이런 말은 죄송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한데 라오스에서 본 사람들 중 최고로 불량해 보인다. 라오스에서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위협으로 느낀다고 하던데 인상을 쓴 채 엄청나게 큰 소리로 승객들을 부른다. 그런데 짐은 어찌나 상냥하고 부드럽게 실어주던지, 그런데 또 승객들은 퍼즐 조각을 맞추듯 어찌나 밀어 넣던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루앙프라방 국제버스 터미널. (구글 지도 상에 'Minibus station'으로 검색된다.)
나는 좌석 앞에서 멈칫하고 말았는데 내게 허용된 공간이 심각하게 자유를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석을 묘사하자면 일단 선베드를 상상하면 되는데, 각도는 약 160도(20도의 공간으로 뒷사람의 발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로 고정되어 있고 그 길이와 폭이 잘못 빤 니트처럼 쪼그라든 상태다. 안전벨트는 없고, 조악한 쿠션이 적용되어 있다. 168cm인 B가 거의 꼭 맞게 다리를 펼 수 있었으니 아마 170cm를 기준으로 설계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다. 어떻게든 나는 내 몸을 쑤셔 넣을 수는 있었으나 24시간의 여정을 그렇게 누워서만 가야 한다는 것에 비참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고, 심각하게 덜컹거리는 악당의 침대와 함께 덩실거리는 이 즐거움은 대체 뭘까.
루앙프라방~하노이 국제 버스 내부.
기사는 총 넷, 창 하나 없는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만 운전만큼은 프로였다. 위험 요소가 있을 땐 정차하고 모두 내려서 헤드 랜턴을 켜고 길을 살피며 버스는 앞으로 일보, 뒤로 이보 다시 앞으로 삼보 한다. 라오스의 산골 도로는 내가 갖고 있는 도로의 정의를 아주 원천적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중앙선도 아스팔트도 없는 요철만이 가득한 좁은ㅡ굉장히 와일드한ㅡ흙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길을 서로 양보하며 오고 가는 화물차와 버스를 보면서 나는 요동치는 침대에서 '이야, 이건 큰 쓸모는 없겠지만 진기한 경험이 되겠다.'란 생각과 '라오스의 물가엔 물류비가 큰 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선잠을 반복하다 동이 막 튼 무렵, 라오스 북동부 Nam Khan 국경에 도착했다. 초록 봉우리들 사이 근엄하게 자리 잡은 노란 국경 검문소 위로 참새들 지저귀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국경은 7시 정각에 열린다고 하니 제각기 오줌을 누고, 기지개 펴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재미없는 편에 속해 그저 몸을 돌려가며 국경을 둘러본다. 안개와 들개와, 참새만 국경 앞에 줄을 서지 않는다. 국경의 직원들이 출근하고 우리는 줄지어 출국 심사를 통과한다. 그 후엔 내리막길을 직접 걸어 베트남 국경 검문소로 가야 한다. 비록 외길이지만 영리한 들개들은 인도자가 되어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고마운 녀석들이다. 베트남 국경 검문소는 7시 반에 업무를 시작하는지, 줄지어 선 사람들은 안중에 없고 사무실 앞 벤치에 둘러앉아 커피 타임을 즐기고 있다. 시간을 마음대로 쓰고 있는 건 여행자인 내 쪽이지만, 어쩐지 저런 여유도 부럽다. "헬로우, 설", "땡큐, 설" 입국 심사도 무사히 마치고 여권엔 또 새로운 도장이 쾅! 찍힌다. 그새 정이 든 여행자들은 좀 전에 직원들이 커피 타임을 즐기던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라오스 Nam Khan 국경 검문소를 지나며.
버스가 국경을 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보다는 늦었다. 아마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화물차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2시간 정도 지나 베트남에서의 항해가 시작되었고, 중앙선과 포장된 도로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버스도 쌩쌩 달리기 시작하니 곧장 하노이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10시쯤 되어 버스가 멈추고 인상 궂은 기사가 외친다. "Eat! Eat! Eat!" 반가운 명령이다. 버스가 출발한 이래 쫄쫄 굶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매번 들르는 식당인지 기사들은 식당 구석에 구비된 자리에서 맥주와 함께 잔칫상을 즐긴다. 적절한 음주가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안전한 운행에 도움이 될까 싶지만 그러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일종의 커넥션이 있는 식당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음식 맛은 끝내줬다. 베트남 가정식 백반집으로 인당 5만낍을 받는다고 했다. 한데 지갑을 보니 8만 8천낍 뿐. 일단 B에게 5만낍을 쥐어 보내고 급하게 환율 어플을 켜서 3만낍에 1불을 주면 안되겠냐고 협상을 시도했지만, 쿨한 아저씨! 나와 B를 가리키며 투! 8만8천낍 오케이! 사인을 날린다. 처음부터 미소 지으며 조금은 염치없게 굴어볼 걸 그랬다.
아직 갈 길은 멀고 점점 꼬질꼬질해지는 승객들은 배를 채운 것에 감사해하는 듯한 표정이다. 고양이 세수하는 사람, 양치하는 사람, 식후 담배를 태우는 사람, 더위에 뻗어버린 사람 가지각색이다. 하긴, 이 그룹에서 기사는 맥주를 마신다. 그렇게 저마다 퍼져있는 사람들을 (맥주를 마신)기사가 양치기 소년처럼 모아 일렬로 버스에 태운다. 나도 양 한 마리, B도 양 한 마리 되어 다시 자리에 눕는다. 이 불편한 자리가 적응이 될까 싶었지만 나름 편안한 자세를 찾아내어 그대로 시간을 때워본다. 베트남의 어딘가에서 백반을 먹고, 버스는 엔진에 시동을 켜고, 오전은 오후가 되고, 낮잠을 청해보려는데 조금 통행량이 늘어나자마자 같은 기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운전법이 바뀐다. 클락션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좀 적응이 된 사실이지만 베트남에서는 클락션 소리가 어떤 분노의 표시가 아닌 서로의 안전을 위한 주의 정도란다. 낮잠도 물 건너 갔구나 생각이 들 때쯤 인상 궂은 기사가 또 나타나 외친다. "Change! Change! Change!" 뭘 바꾸란 걸까?
바로 버스였다. 버스를 바꿔 타란다. 베트남의 어딘가에서 버스를 바꿔타고 클락션은 더욱 자주, 크게 울렸지만 좌석은 전보다 조금 편해져서 편안히 독서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하노이엔 대체 언제 도착하려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으나 루앙프라방~하노이 간 국제버스 탑승기를 읽어보니 하나같이 다들 버스가 고장이 나서 24시간 소요 예정이었던 버스가 36시간이 걸렸다느니 간신히 2박 3일을 보냈다느니 하길래 하노이에 숙소도 정해놓지 않은 차였다. 바꿔 탄 버스가 오후 5시쯤 되어 휴게소에서 쉬어가는 듯했고, 그곳이 '탄 호아(발음은 탕화에 가까움)'였다. 하노이에 도착하면 저녁 8시가 훌쩍 넘을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숙소도 구하기 어려울뿐더러 지금 배도 고프고, 하노이에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 추후에 항공편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등등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다 결정했다. 내리자고! 여러 이유를 들어 맨 뒷자리에서 유튜브를 보며 웃고 있는 B에게 갔다. (B의 적응력은 볼수록 뛰어나다. 얘는 버스에서 정말 잘 잤다.) "여기서 내리자." B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래!" 한다.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서 내리려는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럴 줄을 알았지만 곧장 '그래'라고 하니 당황스러웠지만, 참 재밌는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하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