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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루바 Nov 11. 2024

[탄 호아] 박씨우(Bạc xỉu), 얼음이 녹듯이 -

베트남 여행기 2.

하차 후, 버스가 떠나자 무(無)의 세계와 마주했다. 잠시 쉬어가는 버스의 승객만이 들렀다 가는 식당과 주차장을 겸하는 대형 공터는 더없이 한적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해볼까. 이곳은 중심가로부터 15km 가량 떨어진 외곽이다, 엄청나게 한적한. 식당의 와이파이를 빌려 언제나처럼 2만 원짜리 호텔을 예약했다. 편리한 세상! 그리고 택시 호출 앱을 이용하려는데 외곽이라 그런지 영 택시가 잡히질 않는다. 무계획이 곧 계획인지 천하태평한 B는 개미만하게 보일 때까지 산책을 멈추지 않고, 미니밴을 모는 기사와 멈춰서 이야기를 나눈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하려는 걸까? 물어보니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잘 풀릴 것이라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일부는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다. 초조한 마음을 내려놓으니 너른 공터 공 차는 아이들이 보인다. 녀석들에겐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최고의 놀이터일 테다. 동시에 이 세상은 내게도 놀이터라는 걸 깨닫는다. 이럴 때면 왠지 사람에게 기대어보고 싶어지는 법. 식당으로 들어가 택시 좀 불러줄 수 있느냐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친절을 베푸는 직원. "깜언!!" 그리도 잡히지 않던 택시가 5분 만에 도착한다. 아름다운 세상!

숙소에 도착해 짐을 대충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베트남에 온 것을 실감 나게 하는 건 찌는 듯한 더위다. 이미 어둑해진 무렵인데도 더위는 굶주린 배보다 훨씬 피부로 와닿는다. 태국, 라오스의 그것과는 또 다르게 끈적하고 진득히 달라붙는다. 더위와 맞닿아 있는 노상 식당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다들 한 손엔 부채, 한 손엔 얼음 맥주를 들고 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KFC를 즐기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지만, 어쩐지 몸은 항상 노상 식당으로 향한다. 메뉴 달라고 하니 아줌마는 날 끌고 간이 주방으로 간다. 하나는 죽, 하나는 국수. 둘 중 하나를 고르고 토핑을 골라!라고 하시는 것 같다. 고수는 빼달라는 말을 유인원처럼 했다. 웃음과 몸짓이 대부분인 대화였지만 아줌마, 내 팔을 찰싹 때리며 오케이 사인을 날린다. 얼음 맥주 주문까지 빼놓지 않고 우리는 단숨에 4그릇을 먹어치웠다. 계산을 하고 풍선처럼 부푼 배를 보여주며 "맛있어요!" 하니 아줌마에 이젠 할머니까지 가세해서 내 팔을 찰싹 때리며 웃는다. 아름다운 세상!

B가 뜬금없이 "나 이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러닝을 하려고."라고 하길래 거의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함께 러닝을 했다. 기상 시각은 6시 전후였다. (7시가 넘어가면 햇살이 강렬해서 달리기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미스테리한 점은 그 새벽부터 어디선가 축제라도 열린 것처럼 베트남 가요가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빨리 일어났던 다섯시 반(해도 뜨기 전이다)에도 눈을 뜨자마자 가요를 들어야만 했다. 아무리 탄 호아 사람들이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지만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작되는 노래에 아무도 불만이 없으려나 싶었다. 어쨌든 그 시각쯤엔 다들 일어나는 것 같다. 일곱 시만 되어도 도로가 오토바이로 가득하니까 말이다. 그치만 모두가 출근하는 길은 아닌 것 같다. 태반은 노상 카페에 앉아 디에우 까이(베트남 북부의 물 담뱃대) 돌려 피우며, 박씨우 한 잔씩 걸치고 있는 것이 이 도시의 아침이다.

러닝을 마치고 나면 나는 동네 카페에 들러 꼭 '박씨우' 한 잔을 사서 마셨다. 박씨우는 베트남식 연유 커피로 영어로는 'White coffee'로 표기하지만, 한 잔 맛보면 박씨우는 박씨우다. 'White'라는 색깔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커피인 것이다. 에스프레소 형태의 진하고 쓴ㅡ심한 곳은 참기름(또는 간장)향이 날 정도로 강렬하다ㅡ블랙 커피와 연유를 잘 저어 섞은 것으로 그 순서와 비율에 있어서는 카페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공통적인 점은 눈물이 날 정도로 달콤하고, 양은 일반 커피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다. 이는 차나 커피를 여유롭게, 국경을 넘는 버스처럼 천천히 즐기는 베트남 사람들의 문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즉 박씨우는 얼음을 녹여가며 점차 부드럽고 순하게 변해가는 맛을, 그 여유의 맛을 즐기는 커피인 것이다. 얼음이 다 녹을 동안의 여유, 여기 사람들은 모두 그걸 갖고 있다.

탄 호아는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도시는 아닌 것 같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밋밋한 행정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왕조 시절(1400년대 초반)의 성이 있지만 도심으로부터 30km 이상 떨어져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도심의 풍경은 그저 각종 관공서와 현대적으로 지어진 로터리와 건물들, 공원이 전부다. 아무도 나의 집 진해 용원동을 굳이 찾아오지 않듯이 방문객의 발길은 뜸할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내가 탄 호아 시립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웬 구레나룻 수북한 이방인이 굳이 2만 동의 입장료를 내고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에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에너지 절약을 목적으로 모든 전시관은 불이 꺼져 있었다. 마치 손님 하나 없이 마감한 호텔의 조식당처럼. 그럼에도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언제고 있다. 한때 순천에서 잠적 생활을 하던 친구 Y는 낙안읍성의 경비원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이해될 것 같았다.


박물관은 밋밋한 이 도시와는 정반대로 굉장히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의 고조선처럼 베트남 지방 최초의 국가로 전해지는 '반랑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인 동선 청동기 문화 유적지가 바로 이곳 탄 호아였다. 호텔 엘리베이터 앞 황금색 조형물이 초라하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동선 문화의 최대 걸작 '동선 청동북'의 모조품이었다. 이 도시는 홍보도 참 소심한 편이다. (그래도 지역 축제에서 커다란 원형 스크린에 청동북을 띄운 것으로 보아 지역 내부적으로 자부심은 확실한 것 같다.) 고대 동선 문화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갖고 있는 베트남에서 탄 호아의 지역적 중요성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호찌민을 비롯한 수많은 혁명의 얼굴들이 흑백사진으로 걸려 있고, 전쟁 중 쓰인 정글 모자와 군복이 전시되어 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특히, 프랑스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디엔 비엔 푸 전투'에 있어 탄 호아의 'Pack-bike 부대'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정식 부대는 아니고 자전거를 개조한 민간인들이 군수품 200~300kg을 싣고 400~500km가 넘는 길을 직접 걸어 살아 있는 보급선이 되었다고 한다.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인간의 의지는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마 이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투철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자연스럽게 카키색 정글모를 쓰고 다니는 나라니까.

탄 호아를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놀랄 만한 점은 이렇게 여행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서도 한류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전 베트남적인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식을 주력으로 하는 식당을 흔하게 볼 수 있었고 베트남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K-pop이 흘러나온다. 한국인인 걸 알아채고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말할 줄 아는 분들이 많았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어떤 여학생은 "오빠, 사랑해요."라는 말도 했다. 물론 나한테 한 말은 아니고 그냥 한국어 실력을 뽐낸 것이다. (호텔의 벨보이도 항상 나에게 "오빠"라고 했지만, 그걸 뽐내는 모습이 재밌어 굳이 고쳐주진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호의를 받은 경우가 많아 되려 성조에 유의하여 "신짜오", "깜언" 하고 다녔다. 러닝 중에 러너들끼리 서로 미소를 짓거나 엄지를 척 받게 되면 순간 구름 위를 달리는 것처럼 불쑥 힘이 나는데, 이와 같이 여행 중에 현지인들에게 친절과 호의를 받으면 더위도 잊을 정도로 불쑥 힘이 난다.

다소 심드렁하게 반복되는 도시의 시간과 친절하고 여유를 가진 사람들의 얼음을 녹이는 시간. 그것들이 이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른 아침 호수 공원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아주머니들, 낚싯대 펼쳐놓고 낮잠을 자는 사람들, 반미의 속재료를 물어보자 다짜고짜 입에 멕여주는 할머니, 그런 사람들이 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가는 동안 내가 지켜본 '탕화'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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